김종호 논설고문

‘윤심덕과 김우진이 죽은 지 벌써 5년이 지났지만, 두 사람이 살아 있다는 소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 어느 소도시에서 악기 판매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문이 가장 유력하다. 이 세상에 살아 있다면, 언젠가 그리워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1931년 어느 신문 기사의 요지다. 1926년 8월 5일 기사 내용은 이랬다. ‘지난 3일 오후 시모노세키(下關)-부산 연락선 위에서 젊은 남녀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끝내 시체를 찾지 못했는데, 조사 결과 성악가 윤심덕 씨와 극작가 김우진 씨로 밝혀졌다.’

호가 수선(水仙)인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루마니아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 선율에 가사를 써서 부른 ‘사(死)의 찬미’가 담긴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 음반을 일본 닛토 레코드사에서 취입한 뒤였다. 그와 김우진은 ‘관부(關釜) 연락선’에 올라 귀국하는 길에 선원 앞으로 ‘미안하지만 짐은 각자 집으로 보내주시오.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윤수선’이라고 쓴 편지와 함께 돈 5전을 남겨 놓고, 대한해협에 투신했다. 호가 수산(水山)인 김우진은 호남 갑부의 아들로 일본 와세다대 출신 연극인·소설가·문학평론가였다. ‘광막한 황야(荒野)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하는 ‘사의 찬미’ 음반은 이들의 투신 직후에 나와 엄청난 화제와 인기를 모았다. 이애리수의 1932년 ‘황성의 적(跡)’(왕평·전수린 작사·작곡으로 나중에 ‘황성 옛터’로 제목이 바뀐), 이난영의 1935년 ‘목포의 눈물’(문일석·손목인 작사·작곡)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명곡이다. 서울대 음대 교수를 지낸 정훈모(1909∼1978)는 윤심덕의 그 노래에 감명받아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그 정사(情死)는 영화·TV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소재이기도 했다. 승선원이 구출해 살아 있었다면 두 사람은 어땠을지를 상상한 연극 ‘관부연락선’도 있다. 희곡은 이희준이 썼다. 그 연극이 오는 3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서울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다시 공연된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연출자 이기쁨의 의도가 관객 가슴을 울릴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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