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권의 발명 | 존 토피 지음, 이충훈·임금희·강정인 옮김 | 후마니타스
중세유럽서 ‘통행증’ 개념 활용
국제이동 필수문서로 쓰인건
100여년전 ‘1차 세계대전’ 직후
여권없는 사람=국가없는 사람
난민사태서 ‘통제의 민낯’ 드러나
원치않는 자 입국 거르는 용도도
미국 사회학자 존 토피가 ‘여권의 발명’에서 한 줄로 정리한 ‘여권’의 본질이다. 저자는 여권이란 국가가 이동하는 개인의 ‘신원(identity)’을 확인하고, 누가 ‘내부자’이고 ‘외부자’인지, 누가 왕래할 수 있고 누구는 불가능한지를 구분하는 증명서라고 말한다. 한국어 제목은 원제(‘The invention of the passport’)를 그대로 옮겼는데, ‘탄생’이 아니라 ‘발명’에 주목한 제목이 시사하듯 저자는 여권 통제가 최근에야 시작됐으며 민족 정체성을 바탕으로 국가 통합을 촉진하기 위해 지배 엘리트들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는 점을 폭로한다. 자본주의 발전을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과정으로 파악한 카를 마르크스, 근대국가 발전을 국가가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는 과정으로 이해한 막스 베버를 언급하며 여권을 통한 이동수단 독점이 근대세계의 ‘세 번째 독점’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니 ‘여행의 환상’을 떠올리며 책을 펼쳤다면 적잖이 당황할 수 있다. 책은 여행지 공항에서 여권에 도장이 ‘쾅’ 찍히는 순간의 설렘엔 관심이 없다. 대신 그 설렘의 이면에 감춰진 ‘포섭’과 ‘장악’ ‘배제’의 역사를 파헤치며 ‘해외여행의 필수템’으로만 여겼던 소책자를 바라보는 새 관점을 제공한다.
저자에 따르면 유럽 일부 국가는 16~17세기 절대주의 시대부터 여권 통제를 시도했다. 1548년 프로이센 제국은 집시와 부랑자에게 통행증 발급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반포했고, 프랑스 루이 14세는 1669년 왕국을 떠나려는 사람은 반드시 여권을 소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일관된 국제 체계의 미비로 여권 소지를 의무화한 프랑스조차 자국에서 발급받은 문서가 없는 외국인에게 직접 여권을 발급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반체제 세력의 저항, 19세기 중후반 ‘국경의 존엄성을 전혀 개의치 않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부상 등으로 인해 문서의 이동을 통제하는 조치는 한동안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늘날처럼 여권이 국제 이동을 위한 필수 문서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인 1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1914년 8월 울려 퍼진 전쟁의 총성은 “정부가 외국인을 ‘의혹’과 ‘불신’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전시 체제가 낳은 외국인 혐오, 조국에 원한을 품을 가능성이 있는 이들에 대한 적대감은 유럽 전역에 여권 통제가 재도입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자국민과 외국인을 구별하기 위해 지문이 필요한 신분증을 발행했고, 영국은 외국인의 출입국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미국처럼 이민 제한을 위해 ‘출신국 할당제’를 도입해 해외 주재 미국 영사들에게 할당량을 통제하는 업무를 맡긴 나라도 있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엔 여권 소지자의 생체 정보를 내장한 전자 여권이 확산하면서 현재 110여 개 국가가 전자 여권을 채택하고 있다. 저자는 국가가 문서와 행정력으로 인구를 장악한 일련의 조치를 ‘신원 확인의 혁명’이라고 명명하며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알려주는 여권은 영구적으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리 세계의 일부가 됐다”고 지적한다. 이동 기술은 빠르게 향상됐으나 입국 통제의 강화로 “더욱 개방적인 동시에 더욱 폐쇄적인 국경”이 그어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동 통제가 독일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의 비극에 일조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혈통을 구분하는 인종적 제국주의 프로그램을 위해선 각 집단에 대한 신원 확인이 필수였다. 이에 나치는 효율적인 노동력 사용을 위한 일종의 국내 여권인 ‘노동 수첩’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 직전 전체 인구를 감시망 아래에 두는 ‘국민 명부’를 완성했다.
근대국가들이 장벽을 둘러친 ‘갑각류 국가’로 변모하면서 발생한 또 다른 문제는 ‘국가 없는 사람들’의 출현이다. 국가 없는 사람들, 즉 법적 신분을 증명할 문서가 없는 난민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가 간 역학관계의 민낯을 드러냈다. 난민들이 처한 곤경은 “그들이 법 앞에 평등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1922년 국제연맹(국제연합의 전신)이 러시아 난민을 위해 발급한 ‘난센 여권’, 1951년 국제법상 최초로 난민의 지위를 규정한 ‘난민 협약’ 등 초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정치적 여권’이 낳은 이동 통제의 모순을 해소하기엔 여전히 역부족이다. 영미권과 유럽 사례를 중심으로 쓴 책이지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89개국을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한국 여권의 영향력은 세계 3위권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배제된 불법 이주 노동자 문제, 2018년 벌어진 예멘 난민 사태 등은 “여권은 한 국가가 원치 않는 자들의 입국에 대처하는 제1의 방어선”이라는 저자의 통찰을 곱씹게 한다.
책은 2000년 미국과 유럽에서 출간된 초판에 9·11 테러 이후의 이야기를 추가해 2018년 내놓은 2판을 번역했다. 384쪽, 1만8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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