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현 단국대 에너지공학과 교수

어떤 사회가 선진사회일까? 여러 개 답이 있을 수 있지만, 많은 전문가는 신뢰 사회라고 답한다. 사회 구성원 누구나 정직하며, 다른 구성원도 정직할 것이라고 믿는 그런 사회다. 구성원끼리 불신하면, 상대가 진실을 말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검증 요구가 뒤따른다. 이 검증이 한 차례로 끝나면 다행이다. 검증에 검증이 꼬리를 무는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불신 사회에서는 갈등과 분쟁 증폭에 따른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그 부담은 사회 구성원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가게 마련이다.

요즘 월성 원자력발전소가 논란의 한복판에 있다.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과정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월성 부지 삼중수소 누출 논란까지 더해져 화제의 폭발성이 크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이슈 만들기에 급급하다.

사회 일각에서 월성 원전 부지에서 삼중수소가 누출됐고, 일부 시설이 노후화하면서 훼손돼 국민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덧붙인다. ‘안전 최우선’은 지당한 원칙이다.

전문가들은 삼중수소로 인한 방사선 영향이, 멸치나 바나나 등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음식물을 먹었을 때 받는 정도의 미미한 수준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미미한 수준’이라는 결론은 거두절미한 채, 비유 대상으로 삼은 멸치와 바나나를 문제 삼아 전문가들의 발언 진의를 왜곡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삼중수소의 영향 평가 방법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평가 방법은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의 평가 방법을 바탕으로 한다. ICRP는 방사선 방호 분야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기구다. ICRP는 1928년에 설립된 이후 수십 년간 수행한 과학적 조사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평가 방법과 데이터를 개발하고 경신해왔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 방법과 데이터의 신뢰도를 인정해 피폭 방사선량 평가지침에 반영했고, IAEA 회원국은 이를 자국의 안전규제에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국제적으로 공인된 방법마저도 자기 입장에 맞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월성 원전에서 배출된 삼중수소가 기준치를 넘었는지,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다. 이미 원전 운영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은 기준치를 넘어서는 삼중수소가 배출된 바 없다고 여러 차례 밝혔으며, 원전 안전규제 기관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역시 기준치를 초과한 방사성물질의 외부 방출은 없었다고 했다. 2018년에 조사한 월성 원전 주변 주민들의 체내 삼중수소 최대 농도 결과를 보더라도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국민이 연간 받는 자연 방사선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확인됐다. 이번 논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월성 원전 주변 거주민들이다. 그러잖아도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운 마당에 괴담까지 더해지면서 주변 상가의 매출은 반 토막이 났고,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말도, 최고 권위의 국제기구의 말도, 명백한 데이터를 보여주는 조사 결과도 믿을 수 없다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것 아닌가? ‘아니면 말고’ 식의 끊임없는 의혹 제기가 과연 ‘안전 최우선’을 위한 것인지 의심이 든다. 필자 역시 불신에 빠지게 되지나 않을지 겁난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