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근 ‘눈’
극장을 나온 후에도 영화 ‘미나리’에서 한예리가 부른 ‘비의 노래’(Rain Song)가 계속 마음을 적신다. 음악동네엔 유달리 강우량이 많다. ‘비 내리는 영동교’ ‘비 내리는 고모령’ 등 장소불문이지만 재난안전대책본부는 따로 없다. 빗속에서 주로 사랑하거나 이별하기 때문이다. ‘이별장면에선 항상 비가 오지’(Ref ‘이별 공식’ 중).
비는 그리움을 부추긴다.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신중현 ‘빗속의 여인’ 중), ‘비 내리는 거리에서 그대 모습 생각해’(이문세 ‘빗속에서’ 중). 기차도 빗속을 달리면 러브스토리의 배경이 된다.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김수희 ‘남행열차’ 중).
‘비 내리는 호남선’은 정치 드라마 ‘제1공화국’의 배경이 된 노래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이 눈물을 흘려야 옳으냐’(원곡 손인호). 1956년 투표 열흘 전 열차에서 별세한 대선후보 신익희의 추모객들이 이 노래를 합창하자 당시 작사가 손로원과 작곡가 박춘석이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3월에 내리면 온도와 관계없이 봄비다. 몇 명이 모인 자리에서 ‘봄비’를 선곡할 때 어떤 가사로 시작해야 합창이 가능할까.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원곡 이정화 1969), ‘봄비 속에 떠난 사람’(이은하 1979), ‘그녀를 잊어보려 하지만’(장범준 2016). 세대별로 봄비는 리듬과 멜로디가 다채롭다.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봄비’가 실려 있다. ‘유리창에 예쁜 은구슬 쪼로로로롱’(김성균 작사 작곡). 제11회 MBC창작동요제(1993) 대상곡도 ‘봄비’다. ‘소록소록 봄비가 내리는 들에/ 방글방글 새싹들이 얼굴 내밀고’. 당시 노래를 부른 강릉 노암초 6학년 김유정 어린이는 지금 어떤 ‘봄비’를 부를지 궁금하다.
4월 초까지도 눈 맞은 기억이 뚜렷하다. 눈 오는 밤에는 추억이 집합한다. ‘그 시절의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엇 할까’(조하문 ‘눈 오는 밤’ 중). 소설가 최인호가 작사하고 송창식이 부른 ‘밤눈’은 나의 오랜 애창곡 중 하나다. 무심코 들으면 설경이 떠오를 뿐이지만 유심히 들으면 심경(心境)도 보인다. ‘당신은 못 듣는가/ 저 흐느낌 소릴(중략) 눈발을 흩이고 옛 얘길 꺼내/ 아직 얼지 않았거덩 들고 오리다’.
아직 얼지 않은 추억 한 송이를 마음속에서 꺼내본다. 친구들은 책상 앞에 명언 하나씩을 걸어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화내지 마라’. 러시아 시인 알렉산데르 푸시킨의 시를 암송하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다. ‘슬픈 날들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들 오리니’.
어느 날 음악동네로 이 시가 전입했다. 곡을 입힌 사람은 뜻밖에도 현직 경영학과 교수다. 아, 기억난다. 1981년 제1회 MBC대학가곡제에서 대상을 받은 김효근. 노래 제목은 ‘눈’이었다. ‘조그만 산길에 흰 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욱을 영원히 남기고 싶소’.
뒤돌아보니 그의 발자국은 연구실에도 남고 음악실에도 남았다. ‘부딪히고 넘어져도/ 한걸음 또 한걸음/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김효근 작사 작곡 ‘가장 아름다운 노래’ 중). 그는 노래로 꿈을 말하고 뜻을 전한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 아직 부르지 않았지’. 세상은 넓고 노래는 넘친다. 어떤 노래는 가요라 부르고 어떤 노래는 가곡이라 부르지만 뭐라고 불러도 노래는 불러야 노래다.
작가·프로듀서 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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