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92세이신 아버지는 자신을 노목이라 칭하신다. 하지만 난 아버지를 봄꽃이라 부르고 싶다. 달력의 숫자들이 바람에 날려간 듯, 5남매 중 유독 많은 사랑을 주셨던 아버지의 셋째 딸이 60이란 나이가 됐다. 입춘이 지나 꽃샘추위로 꽤 쌀쌀했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이생에서 마지막 출판이라 생각한다며 그동안 차곡차곡 써놓은 귀한 시들을 내게 보여 주셨다. 이젠 눈도 잘 안 보이고 정신도 없다 하시면서 교정을 봐 달라고 하셨다.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하라 하셨지만, 아버지 연세를 생각할 때 자식 된 내 마음은 서둘러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없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 씨 성에 5남매를 두셨으니 이 생애 5권의 책을 남기고 싶다며 틈틈이 수필과 시를 써오셨다. ‘무던히 살았네’란 제목으로 5번째 저서가 될 120여 편에 가까운 시를 한 편 한 편 읽다 보니, 일제강점기 유소년기와 6·25전쟁으로 얼룩진 학창시절, 교직과 기자생활을 하셨던 청년기, 5남매를 낳아 키워낸 힘겨웠던 긴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앞을 스쳤다.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의 바탕에는 곁에서 65년이란 세월을 해로하신 어머니가 계셨고 시 곳곳에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겨 있어 시를 읽는 나 역시 먹먹한 속내를 감출 수가 없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퇴임하신 후에는 고향 생가 빈터에 냇가의 돌 하나하나를 주워 나르며 ‘화순 원곡(源谷)문학관’을 지으셨다. ‘원곡’은 아버지의 호다. 문학관을 가꾸는 와중에도 수필과 시로 등단하시며 젊은 문학도 못지않게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 오셨다. 서울시우문인회 초대 회장과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회원, 한맥문학가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시며 지금도 서울시우문인회 명예회장직을 맡고 계신다.
책을 좋아하신 아버지는 내게도 귀한 추억을 남겨주셨다. 겨우 한글을 알게 됐던, 초등학교에도 입학하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3권의 전래동화집이 놓여 있었다. 동화책에는 ‘연오랑과 세오녀’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등이 실려 있었는데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느껴진다.
당시 우리 집은 아담한 단독주택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출입문 쪽만 빼고 방의 모든 벽을 온통 책으로 채워주셨다. 달마다 구독해주셨던 어린이 잡지와 위인전, 세계문학전집과 백과사전들이 가득했는데 방과 후면 나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책을 읽으며 그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버지께서 채워주신 책들로 가득한 자랑스러운 나만의 보물섬이었다. 지울 수 없는 또 하나의 추억은 봄이 되면 마당의 작은 꽃밭을 어머니와 함께 정성스레 가꿔주셨던 일이다. 사계절 내내 꽃향기와 푸르름으로 가득했던 어린 날의 꽃밭은 지금도 아지랑이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문학관 마당에는 부모님의 끝없는 사랑처럼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는 작은 분수와 연못이 있다. 그리고 마당 한쪽 아버지의 시비에는 첫 시집의 제목인 ‘팽이야, 볕에서 놀자’란 문구와 함께 활짝 웃고 계신 아버지의 미소가 오는 사람들을 반긴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면 어릴 적 보았던 빛바랜 책들과 꾸준히 모아주신 3만여 권의 책이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자식들을 생각하며 한 권, 한 권 꽂으셨을 아버지의 손때 묻은 그 많은 책을 다 읽을 수가 있을지 솔직히 자신은 없다. 하지만 틈나는 대로 책을 펼치며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가슴에 새기리라 다짐한다.
노목이 아닌 봄꽃으로 내 맘 속에 영원히 피어계실 내 아버지! 이번 주말엔 셋째 딸을 든든한 지팡이 삼아 매화 향기 가득한 꽃그늘 아래로 봄나들이 가세요.
오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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