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첼로의 성자’ 카살스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후
유럽 돌며 ‘평화 호소’ 연주회
‘독재자 프랑코’에 대한 항거
죽는날까지 고향 땅 안 밟아
수십년간 난민 구제 활동 헌신


삶의 고비마다 ‘이 사람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을까’라고 떠올릴 수 있는 롤모델을 갖는 것도 괜찮은 ‘웰 에이징’의 방법이다. 거울 앞에서 새치와 주름을 관리하며 내가 잘 늙어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음악사에서 이름 앞에 ‘거장’이란 수식어가 붙은 음악가는 종종 발견할 수 있지만 ‘성자’란 호칭으로 존경 그 이상의 숭배를 받는 음악가는 흔치 않다. 첼로의 성자 파블로 카살스(1876∼1973)는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또 늙어가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음악가다.

“카살스 선생님, 당신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매일같이 하루에 6시간씩 연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첼로의 성자라 불리는 카살스에게 기자가 질문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아직 매일, 조금씩 실력이 좋아지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당시 카살스의 나이는 95세였다.

1936년,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와 독일 히틀러의 지원을 받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은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다. 카살스는 프랑코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곧장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회를 열었고 이틀 통해 스페인의 평화를 위해 도와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당시 프랑코의 부하 중 1명은 라디오에서 “카살스, 당신을 잡기만 하면 두 팔을 모두 잘라버리겠다”며 협박했다. 하지만 카살스는 굴하지 않고 1939년 프랑스 프라드로 이주해 모든 연주 활동을 뒤로하고 스페인의 난민들을 구제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날까지 스페인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카살스가 3번째 결혼을 발표했을 때 온 세상이 깜짝 놀랐다. 결혼을 발표할 당시 그는 82세 고령이었고, 신부 마르타 몬테스는 22세였기 때문이다. 60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는 사랑에 대해 한 기자가 마르타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카살스는 나이를 초월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나이 든 사람의 지혜와 젊은이의 패기를 겸비한 사람이었죠. 그런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요.”

101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젊음의 비결에 대해 고 안병욱 교수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전한다. “공부하고 여행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카살스는 죽는 순간까지 공부했다. 매일 아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곡을 연주하고 하루에 꼬박 6시간씩 연습하며 경이로운 순간들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평화의 사도로서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여정을 걸어나갔다. 그는 젊음과 늙음에 대해 거울에 비치는 신체의 외모를 기준 삼지 않았다.

“지난 생일로 나는 93세가 됐다. 물론 젊은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나이는 상대적인 문제다. 일을 계속하면서 주위 세계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면 사람들은 나이라는 것이 반드시 늙어가는 것만을 뜻하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사물에 대해서 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느끼고 있다. 나에게 인생은 점점 매혹적인 것이 돼가고 있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오늘의 추천곡
- 카탈루냐 민요 ‘새의 노래’


파블로 카살스가 1939년 프랑스 프라드로 망명한 이후부터는 맨 마지막에 항상 연주하는 곡이 있었다. 바로 그의 고향 카탈루냐의 민요이자 캐럴인 ‘새의 노래’다. 이 곡을 연주하는 이유는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자 온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1971년 유엔의 날, 카살스는 ‘유엔 평화상’을 받았다. 95세의 카살스는 하 연주에 앞서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새의 노래’입니다. 이 새는 ‘피스, 피스, 피스’라고 웁니다. 이 아름다운 곡은 내 조국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바로 카탈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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