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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 지음│김영현 옮김│다다서재

말기암 선고 받은 철학자와
의료인류학자의 필담 교환

질병에 대한 의학의 고정관념
냉정한 시선으로 비판 던져

있는 그대로 죽음 이야기하며
마지막까지 미래의 삶 살아


“죽음이 온다.”

일본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에게 ‘죽음’이란 마르틴 하이데거의 문장처럼 ‘분명히 다가온다. 다만 지금은 아닌 것’이었다. 수년간 앓아온 유방암이 다발성 전이를 일으켜 의사로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할지 모른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지금은 아닌 것’이 아니라 ‘눈앞에 닥친 죽음’을 실감한 미야노는 임상현장에서 질병과 죽음을 고민해온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에게 서신 교환을 제안한다. 자신이 평생 천착해온 ‘우연’과 ‘필연’을 주제로.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2018년 학술 모임에서 처음 만난 두 여성이 이듬해 4월부터 두 달 동안 주고받은 스무 통의 편지를 담은 기록이다. 야구광인 두 사람은 ‘캐치볼’을 하듯 필담을 이어가며 죽음이라는 불가사의한 운명 앞에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사유한다.

미야노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증세가 심각해지기 전까진 질병에 대한 현대의학과 사회의 고정관념을 ‘냉정한 시선’으로 비판한다. “이 약을 먹으면 몇 %의 확률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유발하는 모호한 공포, “암이 나으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라는 물음에 담긴 폭력성은 ‘단순하고 조잡한 운명론’을 퍼트릴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방사선 치료를 받는 와중에 연구와 강연, 야구경기 관람 같은 ‘일상’을 영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 거리’는 의사의 경고가 현실화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암세포가 퍼지고 모르핀을 대량 복용해도 호흡조차 뜻대로 되지 않자 미야노는 의사의 조언대로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고 의학 통계를 홀로 분석한다. 약초를 달여먹는 ‘민속요법’이나 ‘대체요법’엔 눈길 주지 않고 의사의 지시만 고분고분 따르는 ‘착한 말기 암 환자’ 미야노에게 이소노는 “수도승 같은 합리성의 화신”이라고 말한다. 이 얘기를 들은 미야노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우연성과 합리성의 철학’이 품은 딜레마를 다시 들여다본다. 20세기 초반 구키 슈조가 체계를 세운 이 철학은 합리적 예측을 바탕으로 미래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욕구 너머에 있는 우연성을 직시한다. 왜 ‘세잎 클로버’가 아니라 ‘네잎 클로버’인지 이유를 알 수 없듯 ‘필연성’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우연의 수수께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야노는 죽음이라는 실존적 위협이 닥친 후에야 “우연히 태어나는 ‘지금’에 몸을 내던질 용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우연 속을 살아가는 삶이란 무척 멋집니다. (하지만) 병에 걸려 불안에 쫓기던 저는 합리적으로 미래를 예측해 자신을 지키려 했습니다.”

두 사람이 ‘우연과 합리성의 딜레마’와 함께 ‘대화의 딜레마’를 느끼면서 필담은 또 한 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의 대화는 “‘놀이’라고는 없는 경직된 말들”로 가득하기 마련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건강한 내가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고, 아픈 사람은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우물쭈물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바니 글레이저가 언급한 개념 ‘상호 허위’를 실천하듯 “빨리 낫길 바라요” “몸조리 잘하세요”라는 흔한 인사말조차 하지 않았던 이소노는 ‘대화의 벽’에 부딪힌 뒤 단도직입적으로 직구를 날린다. 미야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자고, 대신 절대로 죽지는 말라고.

이때부터 대화는 출발점(點)과 도착점(點)을 곧장 연결하는 ‘수송’이 아니라 이리저리 뻗어 나가는 선(線)처럼 예측 불가능한 ‘도보 여행’ 같은 활기를 드러낸다. ‘예의를 갖춘 거리감’을 무너뜨리고 속내를 꺼내는 미야노는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애쓰는 삶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고백하고, “전부 포기하고 죽어가는 암 환자가 되고 싶다”며 지친 기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에 이소노는 “도망치지 마. 이 승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채찍질한다. 내일 당장 끝날지 모르는 삶이지만 “편지가 조금 더 쌓이면 책을 출간하자”는 먼 미래의 약속을 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미야노는 원고를 모두 넘기고 서문까지 마무리한 뒤 눈을 감았다. 번듯한 대학교수였던 이소노는 미야노가 세상을 떠난 후 “알 수 없는 미래와 마주하고 싶다”며 재야 연구자가 됐다. ‘필연의 죽음’을 어찌하지 못한 이별이지만, 책장을 덮은 뒤 전해오는 것은 비관이 아닌 낙관의 기운이다. 미야노의 말처럼 그는 “불행이 아닌 불운 속에서 인생을 되찾는 강인함을 얻었기에”. “우연에 ‘무력(無力)’하게 휘말리면서도 그 우연 속을 살아가는 ‘초력(超力)’”이 인간의 운명임을 알았기에. 284쪽, 1만4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나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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