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단짝 친구 최홍식

홍식아! 54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생각나지 않니? 난 당산동, 넌 영등포동에 살았었지. 내가 널 집까지 바래다주면 넌 또 날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러길 다섯 번 이상 하고 나서야 우린 다시는 못 만날 사람인 양 굳은 악수를 서너 번 하고 헤어졌었지. 내일 아침이면 또 만날 건데….

그 우정은 대학 때까지 이어져 난 영어, 넌 수학을 중3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과외선생 노릇도 오랫동안 했었잖니? 지금처럼 따뜻한 봄바람이 불 때면 여의도비행장의 휙휙 돌아가는 감시등 불빛을 받으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밤을 새우다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리고서야 발길을 돌렸었지.

학생독립운동기념일기념 전국음악경연대회에 나갈 때 내가 노래를 부르면 넌 항상 잘 불렀다고 감탄사를 연발했었지. 내 인생에서 그렇게 내 노래에 찬사를 보낸 사람은 국민학교 선생님, 중·고등학교 음악 선생님 말고는 너밖에 없었던 것 같아. 우리 집 식구들도 예술가는 돈이 많이 들어가고 가난한 직업이라며 관심도 없었잖니. 그만큼 넌 참 너그럽고 매사가 긍정적인 아주 착한 친구였지.

학교를 끝마치면 우린 항상 어깨를 부딪치며 때론 손을 꼭 잡고 학교 후문을 나와 라일락꽃 만발한 해군본부 담 길로 걸어 왔었지. 그때 난 라일락 향기가 그렇게 좋은 줄 처음 알았어. 당시 어느 여가수가 부른 ‘라일락꽃이 필 때면…’이란 노래가 유행했던 것도 기억나네.

아침에 학교 갈 때는 영등포역 굴다리를 지나서 철길을 따라 같이 걸어갔었지. 가을이면 선로 건너뛰기를 하며 기차가 어느 길로 올지 판단하고는 좌우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 사이로 피하곤 했지. 그러다 가끔씩 지각을 했는데 그때마다 ‘헐랭이’ 선생님은 내 엉덩이를 몇 대 더 때렸었지. 덩치가 큰 내가 널 꼬셔서 지각한 거라면서…. 그 선생님도 나보다 너를 더 아꼈던 것 같아.

또 일요일 날이면 영등포동에서 염창동 반쪽산까지 맨발로 달리곤 했었지. 그러다 한번은 돌아오는 길에 장돌뱅이가 좌판을 펼쳐놓은 화살 맞히기 게임에서 내가 계속 맞히니까 받은 상품 전부를 되돌려 주자고 할 정도로 넌 참 착했지.

그런 네가 왜 연락이 되지 않는 거니? 전화도 도통 안 받고…. 번호가 바뀐 거니? 10여 년 전 넌 약간 어눌한 말투로 ‘뇌졸중으로 한 번 쓰러지고도 완쾌됐다’면서 자전거를 타고 내 가게에 자주 왔었지. 가끔 캔맥주도 마시며 건강을 과시했었는데…. 어느 날부터 네 얼굴을 볼 수가 없었지. 동창에게 네 안부를 물어보니 네가 내 가게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또다시 쓰러졌다는 거야.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 전화했을 때 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면서 날 안심시켰었지. 그때 “전화 받을 수 있겠어요?” 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작게 들렸던 게 생각난다.

내 친구 최홍식! 신호는 가는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니? 무슨 일이 있는 거니? 혹시 요양원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치매에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돼 마음이 답답하다. 꼭 연락이 돼서 얘기도 나누고 그 옛날 라일락 향기 맡던 오솔길도 걸어 보고 싶구나. 보고 싶다 홍식아.

친구 김도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립습니다·자랑합니다·미안합니다’ 사연 이렇게 보내주세요

△ 이메일 : phs2000@munhwa.com△ 카카오톡 : 채팅창에서 ‘돋보기’ 클릭 후 ‘문화일보’를 검색. 이후 ‘채팅하기’를 눌러 사연 전송△ QR코드 : 독자면 QR코드를 찍으면 문화일보 카카오톡 창으로 자동 연결△ 전화 : 02-3701-5261

▨ 사연 채택 시 사은품 드립니다.

채택된 사연에 대해서는 소정(원고지 1장당 5000원 상당)의 사은품(스타벅스 기프티콘)을 휴대전화로 전송해 드립니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