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민(1942∼2015)

이론가이자 방송인으로서 국악 저변 확대와 대중화에 힘써온 풍강(豊江) 최종민 선생이 뇌종양 투병 끝에 이 세상을 떠난 지 만 6년이 지났다. 그는 일반 대중이 다가가기 어려운 우리 국악을 방송과 무대를 통해 명쾌하고도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해설해 많은 사람이 국악을 쉽게 즐길 수 있게 했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조곤조곤 해설해주던 최 선생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최 선생은 1942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나 경북 풍기에서 자랐다. 그의 아호는 풍기의 ‘풍’과 강릉의 ‘강’에서 비롯됐다. 풍기초와 안동사범병설중,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국악 이론을 전공했다.

그는 1968년 안동교대 교수로 출발해 1970년 강릉교대 교수, 1982년 전남대 교수, 1983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1998년 남원정보국악고 교장, 2000년 국립창극단 단장을 지내고 타계하기까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냈다.

말이 겸임교수이지, 실제로는 주임교수처럼 매 학기 강의를 개설하고 강사를 섭외하는 등 행정업무까지 도맡으며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최 선생과 필자의 인연은 각별하다. 최 선생은 내 학위 논문 심사위원이기도 했고, 평소 세미나나 학술회의를 통해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나 필자가 서울국악예고(현 국립전통예고)의 학교 국립화 추진 실무 책임을 맡아 국립화를 반대하는 세력과 외롭게 싸우고 있을 때 전면에서 나를 지지해준 덕분에 여전히 고마움이 가시지 않는다.

필자가 학교 국립화를 이루고 학교를 나와 (사)전통공연예술연구소를 개소했을 때도 개소식에 친히 와서 힘을 실어줬다.

2011∼2012년에는 서울시문화재위원회 제3 분과인 무형문화재 분과에서 함께 위원으로 활동하며 더욱 관계가 돈독해졌다. 이후 필자는 최 선생을 ‘구례 동편제소리축제’ 축제추진위원장으로 경남 구례군에 추천해 축제 차별화를 도모하기도 했다.

최 선생의 큰 강점은 친화력이었다. 오랫동안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인지도가 높은 이점을 활용, 문화계뿐 아니라 정관계, 언론계, 재계, 사회 전 분야에 폭넓은 인맥을 유지했다. 그와 처음 만난 사람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능력이 탁월했다. 한때 정악계와 민속악계가 대립 구도를 이루고 있었을 때도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을 유지했다. 한때 구설수와 송사에 휘말려 험담을 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분명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국악을 보급하기 위해 1977∼1988년 KBS TV ‘국악의 향기’ ‘국악교실’을 진행했고, KBS FM ‘흥겨운 한마당’을 진행했다. 1994∼2000년 EBS FM의 ‘우리가락 노랫가락’, 2000~2002년 KBS TV ‘국악한마당’, 2001년 국악방송 ‘최종민의 국악세상’에서 MC를 맡았다.

그는 “사람들이 우리의 음악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에 교육 현장에서는 우리의 음악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말이 가장 잘 표현되는 우리 노래를 만들고 누구나 쉽게 몸과 마음으로 우리 노래를 부르도록 해야 창의성과 심미안도 길러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국악계의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나갔다. 그가 국악계의 크나큰 자산이었기에 그의 타계는 국악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두 손 모아 그의 명복을 빈다.

김승국 서울노원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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