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돼 있는 백남준의 ‘다다익선’. 2002년 노후한 모니터에서 화재가 발생한 뒤로 크고 작은 고장에 시달리다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3년 예정으로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남궁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돼 있는 백남준의 ‘다다익선’. 2002년 노후한 모니터에서 화재가 발생한 뒤로 크고 작은 고장에 시달리다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3년 예정으로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남궁선

■ 기술이 지나간 자리 - ② ‘브라운관’의 성쇠

브라운관 디스플레이는 가로세로 커질수록 앞뒤로도 두꺼워… TV 윗면에 소품들로 장식하기도
2000년대 들어 LCD 시장 커지며 소멸… 스마트폰·PC용 ‘3차원’소품들이 새 생태계 형성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대표 전시물 중 하나인 ‘다다익선’. 백남준(1932∼2006)이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해 설치한 비디오아트 작품이다. 미술관 건물 한가운데 1003개(개천절 날짜를 뜻한다)의 텔레비전 수상기에서 재생되는 백남준의 화려한 미디어아트는, 설치 직후부터 미술관 위아래 층을 오르내리는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명물이 됐다.

하지만 다다익선은 2002년 노후한 모니터에서 화재가 발생한 뒤로 크고 작은 고장에 시달렸다. 미술관은 낡은 모니터를 일일이 교체해 가며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려 했으나 또 하나의 문제가 불거졌다. 브라운관의 시대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설치 당시 모니터를 후원했던 삼성전자도 브라운관 모니터 생산을 중단했으므로 교체 부품을 구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다다익선은 2018년 다시 가동을 중단했고, 2019년부터 2022년까지 3년 예정으로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백남준은 생전에 “화면만 잘 나오면 된다”며 하드웨어에 대해서는 유연한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작품을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하기 위해 브라운관으로 복원하겠다는 기조를 정하고, 이를 위해 해외에서 중고 브라운관을 구입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사실 ‘브라운관을 구하기 위해 세계의 중고 장터를 뒤지는’ 모습은 2021년 한국에서는 퍽 낯설다. 텔레비전이나 모니터가 3차원(3D)의 상자에서 2차원(2D)의 판으로 바뀐 지도 무척 오래됐기 때문이다. 원형의 유지와 복원을 대단히 중시하는 미술품의 속성 덕분에, 우리는 이미 잊고 있었던 브라운관의 부재(不在)를 알아차리는 순간이 온 것이다.


◇ 브라운관과 텔레비전 ‘상자’= 브라운관(Braun tube), 또는 음극선관(CRT:cathode-ray tube)이란 무엇인가? 음극선이란 진공관의 음극 쪽에 높은 전압을 걸어주면 방출되는 전자기파다. 음극선을 효과적으로 방출하는 장치, 즉 음극선관을 만든 독일 과학자의 이름이 브라운(Karl Ferdinand Braun·1850∼1918)이었으므로 ‘브라운관’이라고도 부른다.

음극선의 정체는 사실 전자(electron)의 흐름이다. 전자는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음극선관 자체는 우리 눈에 보이는 영상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영상을 만들려면 형광 물질을 바른 유리판을 앞에 세워야 한다. 음극선관에서 나오는 전자빔 주변에 전자석을 설치하면 그 진로를 마음대로 조절해 유리판의 어느 지점으로든 전자빔을 보낼 수 있다. 전자빔이 유리판을 때리면 유리판에 발라둔 형광물질은 가시광선을 방출하고, 비로소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의 정보가 나타난다. 유리판에는 엄청나게 많은 점이 있지만, 전자빔이 매우 빠른 속도(대략 1초에 전체 화면을 100번 이상 훑는 속도)로 화면의 점들을 때려 주면 인간의 눈은 점 하나하나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 전체가 하나의 그림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20세기 인류 문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발명, 브라운관 디스플레이의 원리다.

구태여 브라운관의 원리까지 시시콜콜 설명한 것은, 실은 옛날 텔레비전과 모니터가 그렇게 앞뒤로 두꺼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음극선관의 길이와 전자빔이 지나갈 통로의 길이를 더한 것이 브라운관 디스플레이의 최소한의 두께가 된다. 큰 화면 구석구석까지 전자빔을 보내려면 음극선관도 그만큼 더 길고 강력해져야 하므로, 브라운관 디스플레이는 가로세로로 커질수록 앞뒤로도 두꺼워졌다.

브라운관 시절의 텔레비전과 모니터는 3D 공간을 차지하는 육면체였다. 텔레비전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붙인 ‘바보상자’라는 별명도 그 육면체 모양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이 커다란 상자들은 가정의 인테리어에 새로운 숙제를 던져 줬다. 어느 날 갑자기 시커먼 상자가 집집마다 거실이나 침실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커다란 상자 모양의 텔레비전에는 앞면뿐 아니라 꽤 넓은 윗면과 옆면도 있었다. 텔레비전의 윗면은 뭔가를 늘어놓기에 충분한 넓은 공간이었고, 텔레비전은 가장 시선을 두기 편한 곳에 놓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계, 인형, 분재, 심지어 작은 수석 등 이런저런 소품들이 자연스럽게 텔레비전 윗면에 자리를 잡게 됐다. 자질구레하게 뭔가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집에서도 윗면을 허전하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레이스 덮개 정도는 걸쳐주곤 했다.

브라운관 모니터도 3D 공간을 차지하는 상자였다. 모니터의 윗면에도 자잘한 소품들이 올라가게 됐다. 전자파를 막아준다며 작은 선인장이나 다육식물 화분을 모니터 위에 올려두는 것도 한때 유행했다. 모니터 위에 보조 선반을 연결해서 소형 프린터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한 공간절약형 고안들도 있었다. 회사나 학교에서는 컴퓨터를 이용해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모니터의 옆면은 자주 점착 메모지로 뒤덮이곤 했다.

1990년대 후반 잠시 유행했던 컴퓨터 책상 가운데는 모니터를 비스듬히 매립하는 형태가 있었는데, 이것도 2D의 화면만 사용자의 시야에 남기고 나머지 3D 공간의 존재감을 줄이기 위한 궁리의 결과이기도 했다.

◇ 차원 하나가 줄어 ‘상자’에서 ‘판’으로 = 그런데 브라운관 모니터는 예상외로 일찍 퇴장하게 됐다. 브라운관 모니터가 기술적 한계에 다다른 것은 아니었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격 경쟁력도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체들은 평판 디스플레이 기술이 언젠가는 분명 브라운관을 대체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LCD 패널 생산 설비에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그 결과 2000년대 중반 규모의 경제가 달성돼 LCD 패널의 가격이 급락했다(기술사에서 이런 양상의 혁신을 설명하기 위해 ‘예측되는 난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2000년대 이후 개인용컴퓨터의 보급이 급격히 늘어난 것도 LCD 시장에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줬다. 가정에서는 더 큰 화면을 즐기고 싶다는 욕구가 평판 디스플레이로의 이행을 촉진했다. 브라운관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대 화면 크기가 대각선 길이로 약 45인치(약 110㎝)인데, 화면이 커질수록 앞뒤로 공간을 많이 차지하므로 이렇게 큰 텔레비전을 거실에 들일 수 있는 가정은 많지 않았다. 이에 비해 LCD나 PDP 텔레비전은 이보다 큰 화면도 쉽게 만들 수 있었고, 화면이 커져도 앞뒤 공간을 거의 차지하지 않았으므로 가정의 거실에도 쉽게 큰 화면을 들일 수 있었다. 이런 요인들 덕에 컴퓨터 책상에서, 그리고 이어서 가정의 거실에서 디스플레이는 3D 입체가 아니라 2D 평면으로 바뀌어 갔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조교수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조교수
디스플레이가 ‘상자’에서 ‘판’으로 차원 하나를 잃어버리면서, 텔레비전이나 모니터의 윗면과 옆면을 터전 삼아 형성됐던 각종 액세서리의 생태계도 큰 변화를 겪었다. 이제 우리의 관념 속에는 더 이상 텔레비전이나 모니터의 ‘윗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점착 스티커를 붙일 ‘옆면’도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모니터 위에 뒀던 소품들은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갔고, 점점 커지는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올려놓기 위해 따라서 점점 커졌던 ‘TV장식장’들도 이제는 다시 간결한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세대 중에는 3D의 텔레비전이나 모니터가 낯선 이도 많을 것이다. 더 이상 텔레비전을 ‘상자’로 인식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바보 ‘상자’”라는 말도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이제는 각종 디스플레이가 2D 평면이라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다 보니, 인간이 살아가는 3D 공간 안에서 이 평면을 편리하게 배치하고 쓰기 위한 도구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3D 공간 안에 적절한 각도로 세우기 위한 그립톡이나 받침대 같은 물건들이 새로운 액세서리의 생태계를 형성해 가고 있다.

이렇게 기술의 변화는 상호의존적인 복잡한 과정이다. 브라운관에서 평판으로 디스플레이가 변화하는 것 자체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와 연결돼 일종의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사물이 그 변화에 연동돼 부침을 겪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기술은 허공에 떠다니는 낱낱의 사물들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물이 연결된 네트워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 네트워크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조교수


■ 용어설명

예측되는 난점(presumptive anomaly) : 에드워드 콘스탄트가 ‘터보젯 혁명의 기원’(1980)에서 선제적인 기술 투자가 이뤄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개념. 새로운 발명이나 발견이 장차 해당 산업계의 지형을 크게 바꿀 것이 예상되면, 비록 현재는 문제없이 작동하는 기술 패러다임이라도 난점(anomaly)에 봉착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으로 예측하고, 그렇게 예측되는 난점에 대응할 신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가 기술 변화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콘스탄트는 1920년대에 프로펠러 엔진 기술이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공기역학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차세대 엔진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일찌감치 촉발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를 전공해 북한의 합성섬유 ‘비날론’ 공업화 과정 연구로 석사학위를, 남한의 ‘통일벼’ 개발과 보급 과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글타자기의 역사에 대해 여러 편의 논문을 출판했으며,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들녘, 2017)를 지었고 ‘과학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넘어’(역사비평사, 2018)를 동료연구자들과 함께 엮었다. 현재 ‘한국과학사학회지’ 부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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