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친구 사주받고 친모 폭행·살해한 ‘안양 세자매’사건으로 조명… 여친에 집단성관계 강요한 사건도
연극‘가스등’서 유래… 판단력 흐린 뒤 “너를 위한 것” 세뇌, 피해자는 되레 가해자 감싸고 의지
‘안양 세 자매의 친모 폭행 사망 사건’, 배우 서예지의 남자친구 조종 의혹 등으로 타인의 심리를 지배한 뒤 조종하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 주목받고 있다.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한 뒤 그 사람을 통제해 파국으로 몰아가는 행위다. 가스라이팅은 1938년 패트릭 해밀턴이 연출한 연극 ‘가스등’(Gas Light)에서 유래됐다. 이 연극에서 남편은 집 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희미하게 만들고는 부인이 ‘집 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부인을 탓한다. 부인은 점차 자신의 인지능력을 의심하다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남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된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자신의 입맛대로 피해자를 조종해 이익을 얻는다. 연인관계라면 질투와 시기를 극복하는 정서적 안정을 얻고, 동업자 관계일 경우 상대의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피해자와 갑을관계를 형성한 뒤 ‘다 너를 위한 행동’이라며 피해자를 끊임없이 세뇌한다.
가스라이팅은 안양 세 자매의 친모 폭행 사망 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7월 경기 안양시 동안구의 한 카페에서 일하는 60대 여성 박모 씨가 사망했다. 경찰 조사 결과 주범은 카페 사장이자 박 씨의 첫째 딸 김 씨였고, 둘째와 셋째 딸도 범행에 가담했다. 이들은 CCTV 사각지대에서 박 씨를 3시간 동안 폭행했다.
세 자매가 검찰에 송치된 이후 카페가 입점한 상가 소유주이자 고인과 30년 지기인 진모 씨의 정체가 드러났다. 진 씨는 세 자매가 재벌가와 결혼할 수 있으나 박 씨가 기를 흔들어대 결혼을 막고 있다며 “네 엄마를 혼내주라”고 이들을 꼬드겼다. 진 씨는 10여 년 전에도 어머니 박 씨를 사주해 세 자매가 아버지를 폭행하도록 지시했다. 세 자매의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숨진 뒤 그가 소유했던 아파트는 2019년 첫째 딸을 거쳐 지난해 진 씨에게 넘어갔다. 진 씨는 또 대부분 공실인 4억 원 상당의 상가 건물을 세 자매에게 8억5000만 원에 넘긴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엔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여러 남성과 강제로 성관계를 갖게 한 가스라이팅 사건이 벌어져 공분을 샀다. 경찰청은 인터넷 커뮤니티 ‘에펨코리아’에 올라온 복수의 성폭행 암시 익명 게시글 작성자와 사실관계 등을 특정하기 위해 내사에 착수했다. 경찰에 따르면 남성으로 추정되는 한 네티즌이 20대 초반 여자친구에게 여러 남성과 강제로 성관계를 갖도록 했다는 내용의 글들을 지난 2∼3월 에펨코리아에 게재했다.
글 작성자는 “여자친구가 울면서 거부했다” 등의 댓글을 달기도 했으며 현재 해당 게시물들은 모두 삭제된 상태다. 이에 작성자를 엄벌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 글이 등장했다. 청원자는 “에펨코리아 회원인 글 작성자가 가학적인 성폭력을 인정하며 ‘여자친구도 좋아서 하는 거냐’라는 질문에 ‘나에게 맞추려고 시작했고 지금은 자포자기’라고 답했다”면서 “가스라이팅과 협박을 이용한 가학적인 강간 및 집단성폭행이었음을 인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해당 청원은 약 13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연예계에서도 가스라이팅 논란이 일었다. 배우 서예지는 지난 2018년 방송된 MBC 드라마 ‘시간’의 주인공을 맡은 당시 남자친구 김정현에게 상대 역인 서현(소녀시대)과의 스킨십을 거부하라고 지시했고, 드라마 대본에서 로맨스 장면을 삭제하도록 종용했다. 서예지는 “나로 인해 자긴 행복하지. 날 그러니 더 행복하게 만들어”라는 메시지를 김정현에게 보냈다. 서예지와 김정현은 ‘공사’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가스라이팅은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닌 ‘정신적 세뇌’인 데다 가스라이팅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심지어 피해자는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가해자를 보호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지난 1월 안양 세 자매의 친모 폭행 사망 사건 1심 재판에서 존속 폭행 치사 혐의로 첫째 딸은 징역 10년, 둘째와 셋째 딸은 징역 7년, 존속 상해 교사 혐의로 진 씨는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세 자매는 법정에서 진 씨는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세 자매는 진 씨의 존재가 없어지면 공황 상태에 빠진다”면서 “정신적 조종을 스스로 차단한다는 건 (세 자매에게) 너무 두려운 일”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불안감을 겪는 사람일수록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사람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할 우려가 크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가스라이팅에 공권력 등 제삼자가 일일이 개입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객관적인 힘’이 필요하며 누군가 죄책감을 유발하게 하거나 눈치를 보게 하면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신의 행동과 주위 환경 등 처한 상황에 대해 타인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부족하면 자신의 행동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휘둘리고 자책하게 된다”면서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습과 주위의 인간관계를 한 발짝 떨어져 객관적으로 보는 힘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전세원 기자 jsw@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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