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내면에 내재한 본능적 욕구 중 하나가 여행이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떠났다. 사냥이다. 지금은 다르다. 삶에 지친 내 영혼의 안식을 위해 떠난다. 여행에는 삶의 질을 높이고 싶어 하는 욕구도 숨어 있다. 쉼 없이 뛰어온 현대인들은 여행을 더 갈구한다. 삶에 잠시 쉼표를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모두가 떠나려고 한다. ‘내일은 나도 여행을 갈 수 있을까’라는 꿈을 꾼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여행길이 막혔다. 돈이 있어도, 시간이 있어도 떠날 수 없다. 지금은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언젠가 떠날 그날만을 기약하고 있다.
10년 전의 일이다. 1주일간 뉴질랜드를 가게 됐다. 그때 지인이 말했다. “피지도 들러 가는 길이 있는데.” 1주일간의 짧은 여정에 피지를 끼워 넣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 우연히 틀어놓은 라디오 방송에서 귀를 솔깃하게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시간이 없다고요? 떠나세요. 핑계에 불과합니다. 일찍이 장자는 여행은 또 다른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바쁜 삶에 가끔은 불시착하는 여유도 필요합니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시착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뉴질랜드로 가는 길에 피지에 불시착하기로 했다. 호텔과 골프장을 예약했다. 피지공항을 빠져나오자 열대풍이 훅하고 불었다. 그 열대풍을 타고 공항 입구에서 피지인들이 노래를 불렀다. 영혼을 파고드는 솔풍의 목소리가 태평양의 작은 섬만큼 쓸쓸함과 허전함을 전했다.
예정에도 없었던 이곳에 불시착해 3일간 쉬며 골프만 치기로 했다. 처음 감행해본 불시착은 떨리면서도 짜릿했다. 좀 더 여유를 찾기 위해 호텔 근처 해변을 걸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열대 야자수 사이로 붉은빛을 토해내는 그곳 하늘은 붉은 물감을 쏟아부은 것처럼 이글거렸다. 호텔 야외 라운지에서 피지인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노래가 귀에 쏙쏙 박힌다. “웃음 짓는 커다란/두 눈동자/긴 머리에/말 없는 웃음이 라일락 꽃향기/흩날리던 날/교정에서/우리는 만났소.” 윤형주가 불렀던 ‘우리들의 이야기’다. 원곡은 피지인들의 민요다. 그곳을 들르지 않았다면 이 노래의 원작자가 윤형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넉넉하게 돌아보면서 가끔 불시착을 통해 나를 충전하는 재미를 알게 됐다. 피지에 불시착하면서 얻은 보석 같은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반짝인다. 일탈을 꿈꾸며 불시착을 감행하길 참 잘했다.
코로나19 이후 여행이 일상보다 소중한 것임을 느끼면서 가끔은 삶에 불시착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오로지 골프만을 생각하고 스코어만 생각하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살면서 가끔은 일탈을, 궤도 이탈을, 계획에 없는 불시착을 용기 있게 실행해 보자. 물론 코로나19가 빨리 끝나길 기원하면서.
이종현 시인(레저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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