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도나 저커버그 지음│이민경 옮김│문예출판사

“여성은 자기 통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낮다”(세네카), “여자라는 파괴적인 종족은 인간 남성에게 고통을 안긴다”(헤시오도스).

‘이 무슨 황당한 여성 혐오인가’ 싶지만, 이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과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남긴 말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로마의 사상이나 신화 속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유럽 등의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 커뮤니티에서 흔히 인용되기도 한다. 고전학자이자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의 동생 도나 저커버그는 새 책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원제 Not all dead white men)’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남초 커뮤니티 ‘레드필(Red Pill)’의 담론을 분석해,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가부장제와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학과 역사를 어떻게 악용하는지 파헤친다.

2012년쯤 만들어져 현재는 23만 명에 달하는 레드필 이용자들은 주로 백인 남성이며, 이들은 지금의 세계가 남성들에게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전체 재소자 가운데 90%가 남성이고, 선진국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보다 3배로 높다고 말한다. 이들은 이런 ‘실제 세계’의 모습을 각성하는 것을 “빨간 약(Red Pill)을 삼켰다”고 표현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진실을 알기 위해 빨간 약을 삼킨 데서 따왔다.

이들은 여성이 독립적인 주체가 아닌 재화(財貨) 수준에 머물렀던 ‘고전고대’의 텍스트와 역사를 전유해 자신들의 끔찍한 사상을 뒷받침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백인 남자야말로 지금의 우리에게 철학과 문학, 예술의 문을 열어준 궁극적인 지혜의 원천이며, 따라서 그 후손인 자신들(백인 남성)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등을 인용해 여성은 기만적이고 타락했으며, 겉으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강간을 당하고 싶어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사이에 ‘거짓 강간 고발’이라는 피해의식이 광범위하게 퍼진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저자는 “레드필은 오늘날 우리 사회와 고전고대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를 숨기면서 가부장제와 백인 우월주의의 절대적인 가치를 입증하려 한다”면서 “고전에 대한 이들의 해석은 고대 세계에 대한 독해라기보다는 자신이 살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열망을 담은 재현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태초에 ‘우수한 종족(백인 남성)’이 있었던 게 아니라, 자신들의 그릇된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택적이고 자의적으로 고전을 악용한다는 얘기다. 저자의 말처럼, 고대의 역사·문학·신화를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활용한 것은 이들만이 아니며, 그 해악은 역사가 똑똑히 보여줬다. 약 80년 전 인류 타락의 극한을 보여준 나치 역시 로마의 후예를 자처했었다. 384쪽, 1만7000원.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오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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