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품는 순간부터 자승자박
속박, 스스로 풀 수 있고 풀어야
바라밀 수행 꾸준히 실행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서 해탈
현재의 자기 행위를 통해서
미래에 무슨 일 생길지 알아
근래에 ‘야! 너두 ○○할 수 있어!’라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표현이 다소 무례한 듯하지만, 상대방에게 일종의 자신감을 안겨주기 위한 멘트랄까? ‘나 같은 사람도 하면 되는데, 넌들 왜 못하겠느냐? 다만 방법이 문제일 뿐!’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야! 나두 해탈할 수 있어!”
사실, 해탈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해탈이란 풀 해(解), 벗을 탈(脫), 말 그대로 속박을 풀어서 벗어나는 것이다. 줄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담배를 끊으면, 담배로부터 해탈한 것이다. 술 없이 못 산다던 사람이 술 없이 잘 살게 됐다면, 술로부터 해탈한 것이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 하던 사람이 ‘그대’ 없이도 잘 살게 됐다면, ‘그대’에게서 해탈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본래 담배 없이, 술 없이, ‘그대’ 없이도 잘 살아왔다. 문득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한 어느 순간부터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속박은 스스로 풀 수 있으며, 스스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택시를 이용했는데, 택시 기사가 상당히 친절하고 운전도 매우 편안하게 했다. 그 비결을 묻자, 기사가 말했다.
“저도 얼마 전까지 이렇지 않았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마음에 죽어라 하고 일했죠. 종종 식사를 거르기도 하고, 사소한 교통법규는 무시해 가면서까지 열심히 앞으로 내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어릴 적 소원이 떠올랐습니다. ‘쌀밥에 고등어구이 반찬 먹을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는 것이었죠. 생각해 보니 이미 소원은 성취됐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좀 더 좀 더 하는 강박관념에 건강을 상하면서까지 앞으로만 질주했던 것이었죠. 이제 그런 생각을 놓아 버리니 건강도 좋아지고 사소한 시비도 많이 없어졌습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 택시 기사처럼, 모든 속박은 자승자박이기에 스스로 놓아 버리면 그대로 즉석 해탈이다.
해탈을 구하던 도신 스님에게 3조 승찬 스님이 물었다.
“누가 묶었냐?”
도신이 답했다.
“아무도 묶지 않았습니다.”
3조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찌 해탈을 구하는가?”
우리는 모두 본래 해탈이다. 그러기에 즉석 해탈이 가능한 것이다.
본래 해탈을 지금 이 순간의 해탈, 즉 지금 해탈로 즉석에서 체험하는 것이 바라밀 수행이다. 예컨대 6바라밀은 본래 해탈을 여섯 가지로 체험하는 연습이다. 보시바라밀과 지계바라밀은 탐욕에서 해탈하는 연습이다. 인욕바라밀과 정진바라밀은 성냄으로부터 해탈하는 연습이다. 선정바라밀과 지혜바라밀은 어리석음으로부터 해탈하는 연습이다. 본래 삼독(三毒)은 없었다. 무명으로부터 홀연히 생겨났기에, 삼독 또한 아바타에 불과한 것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대면해서 관찰하면 사라진다.
탐욕은 이 몸과 마음이 ‘나’라는 그릇된 관념에서 생겨난다. 몸과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이나 재물 등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당기는 에너지인 것이다. 이러한 에너지를 억지로 없애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보시는 에너지의 전환이다. 당기는 에너지를 주는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지계는 에너지의 절제다. 과욕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몸과 마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바타의 현상으로 바라보면 탐욕이 점차 쉬어진다.
성냄은 나의 뜻을 거스르는 대상을 향해 표출된다. 자신의 바람과 반대되는 것을 거부하고 밀어내는 에너지인 것이다. 인욕은 욕됨을 참는 것이요, 정진은 이를 꾸준히 연습하는 것이다. 욕됨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느끼는 것이니, 이 또한 아바타의 현상으로 관찰하면 사라진다. 나와 남이 모두 아바타이니, 아바타가 아바타에게 화를 내는 것은 허망하다.
어리석음은 인과법(因果法)에 밝지 못한 것이다. 인과를 믿지 않고 숙명론이나 신의설(神意說), 또는 요행을 믿는 것이다. 선정을 닦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내면의 지혜가 발생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인과법을 믿게 되며, 더 이상 숙명이나 신의나 요행을 믿지 않게 된다. 숙명론은 ‘콩을 심든 팥을 심든 무엇이 날지는 이미 결정돼 있다’는 것이다. 신의설은 ‘콩을 심든 팥을 심든 무엇이 날지는 신에게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요행을 바라는 것은, ‘콩을 심든 팥을 심든 내가 원하는 게 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
현재의 자기 모습을 보면 과거에 무엇을 심었는지 알 수 있다. 현재의 자기 행위를 보면 미래에 무슨 일이 생길지를 알 수 있다. 꾸준히 6바라밀행을 닦아 본래 해탈을 연습하여, 나도 해탈하고 남도 해탈시키기를!
나 홀로 해탈은 진정한 해탈이 아니다. 국민의 70퍼센트 이상이 백신을 맞아야 집단면역이 되듯이, 국민의 70퍼센트 이상이 해탈해야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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