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롯의 부활’ 출간 김장실 前 문체부 차관

시대의 희로애락 담은 트로트
삶 힘들때 힘 되어준 존재
한직 전전하며 수집한 자료
韓 문화산업 발전의 양분으로

우리 사상·이념까지 전파하는
‘정신문화의 한류’ 확산해야
BTS·기생충의 기적 넘어
‘글로벌 문화제국’ 이끌 수 있어

할머니 영향받아 목청 좋아
어렸을적부터 노래 곧잘 불러
초등학생땐 ‘정동 대감’ 별명


“인생이라는 ‘고난의 바다’를 건너려면 어른도 장난감이 필요합니다. 저에겐 ‘트로트’가 장난감이었습니다.”

1979년 행정고시(23회)에 합격해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 발령받은 김장실 전 차관은 한동안 탄탄대로를 걸었다. 고시 7년 선배보다 승진이 빨랐고, 관가에서 ‘보고서 잘 쓰고 소통능력도 원만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를 통틀어 청와대에서만 10년 가까이 일했다. 자신이 있을 곳은 늘 ‘양지’인 줄 알았는데 정권이 바뀌자 하루아침에 한직으로 밀렸다. 무엇으로 고난의 바다를 건너야 하나. 앞만 보고 달리느라 잊고 살던 ‘기억’을 되짚으니 ‘노래’가 있었다.

김 전 차관이 최근 출간한 ‘트롯의 부활-가요로 쓴 한국 현대사’(조갑제닷컴)는 인생의 ‘음지’가 없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결실이다. 책은 1920~1980년대 히트한 대중가요를 통해 곡절 많은 현대사를 비춘다. 이애리수의 ‘황성옛터’엔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이, 이인권의 ‘귀국선’엔 해방의 감격과 환희가 담겨 있다. 1969년 나온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는 월남전·해외 유학 등으로 인한 가족해체의 시대상을,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은 1980년대 강남의 유흥 풍속도를 보여준다. 전쟁으로 스러져간 청춘의 아픔을 노래한 ‘봄날은 간다’, 이산가족 찾기 열풍에 큰 인기를 얻은 ‘잃어버린 30년’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곡들이다. 노래에 얽힌 사연과 민족사의 굴곡에 저자의 인생 드라마를 곁들여 트로트처럼 구성진 가락을 들려준다. 최근 서울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김 전 차관은 글맛만큼 차진 입담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트롯의 부활’ 씨앗은 美 강연

“청와대에서 한창 바쁘게 일하다 1989년 미국 하와이대로 정치학 박사과정 유학을 떠났어요. 당시 우연히 외국 학생들 앞에서 강연할 기회가 생겼죠. 원래 노래라면 환장하던 터라 ‘한국 대중가요의 정치사회학’이란 주제로 시대를 풍미한 곡과 파란만장한 민족사를 엮어 설명했어요. 부드러운 강의를 위해 중간중간 한국어 가사 그대로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요.(웃음)” 3년 만에 박사학위를 얻고 귀국한 그가 유학 시절을 다시 떠올린 건 10여 년이 흘러 한직을 전전할 무렵이다. 일이 없어 시간이 많아지자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며 자료를 수집했다. 읽고 공부한 것을 주변 사람한테 들려주니 “대중가요에도 역사성을 부여할 수 있구나”라며 흥미로워했다. 모두의 삶이 그렇듯 내리막길이 끝나자 다시 신발 끈을 조일 기회가 왔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문체부 차관에 임명돼 문화산업 세계화 전략을 수립했다. 예술의전당 사장 재직 땐 민간에서 200억 원을 유치해 IBK챔버홀을 신설하며 2010~2011년 연속 ‘공공기관 평가’ 1위에 오르는 성과를 냈다.

“차관이 되고 나서 여러 대학과 기관에서 트로트에 얽힌 시대상을 강연해 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왔어요. 남는 시간에 독학한 내용을 지인들한테 얘기한 게 뒤늦게 소문이 난 거죠. 노래방 기계를 갖다 놓고 15곡 정도 부르고 해설한 경험이 책을 쓰는 자산이 됐어요.”

최근 ‘트롯의 부활-가요로 쓴 한국 현대사’를 출간한 김장실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서울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1920~1980년대 파란만장한 민족사가 담긴 대중가요를 설명하고 있다.
최근 ‘트롯의 부활-가요로 쓴 한국 현대사’를 출간한 김장실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서울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1920~1980년대 파란만장한 민족사가 담긴 대중가요를 설명하고 있다.

◇韓 정치인 최초 뉴욕 카네기홀 공연

“노래도 잘하세요?”라고 묻자 “어릴 때부터 유명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루 종일 노래해도 지치지 않던 할머니 영향인지 가족들이 다 ‘목청’이 좋아요. 고향인 남해군에 있는 은모래 해수욕장을 드나드는 연락선이 들려주는 노래를 뜻도 모른 채 따라 부르곤 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소풍 땐 이미자의 ‘정동 대감’을 불렀더니 어느 순간 ‘정동 대감’이란 별명이 붙었더군요, 하하.” ‘흑산도 아가씨’ ‘가슴 아프게’ ‘물레방아 도는데’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작사가 정두수로부터 칭찬받은 일화도 전했다. “국립중앙도서관 부장으로 일할 때 지인들과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식당에 갔어요. 조미미의 ‘여자의 꿈’을 부르고 내려오는데 갑자기 나이 드신 분이 다가와 묻더라고요. ‘자네 누구한테 배웠나. 참 잘하네. 일주일에 두 번은 여기 오니까 가끔 와서 노래를 불러주게.’ 일면식도 없던 대가의 한마디에 어린애처럼 으쓱했던 기억이 나네요.”

공직을 마친 뒤 19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입성한 그는 2015년 한국 정치인 최초로 뉴욕 카네기홀에서 마이크를 잡으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정식 성악교육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가 노래한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일이었죠. 조용필·패티김·인순이 같은 ‘난다 긴다’하는 아티스트에게만 허락되는 무대니까요. 부산의 한 방송에 출연해 노래 부른 적이 있는데 당시 진행자가 뉴욕에서 활동하는 기획자를 연결해준 덕분에 성사된 공연이었죠.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로 시작하는 ‘동백 아가씨’ 노랫말에 객석을 메운 동포들이 눈물을 훌쩍이자 가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죠.(웃음)”

요즘은 매주 금·토요일 방송하는 유튜브 채널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를 통해 실력을 뽐낸다. 최근엔 유신 시대 젊은이의 무기력을 표현한 송창식의 ‘왜 불러’를 한 곡조 뽑아 올렸다.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며 구슬픈 표정 연기(?)까지 선보이는 그를 보노라면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고 싶어진다. 김 전 차관은 “방송 내용을 정리한 책도 준비 중”이라며 “‘트롯의 부활’보다는 에피소드 중심의 가벼운 터치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고 전했다.

◇“K-팝+K-트로트로 세계 음악계 지배해야”

사랑해 마지않는 트로트가 ‘국민가요’로 떠오른 것에도 벅찬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유행한 트로트가 국악·재즈·발라드 등 여러 장르를 흡수하며 축적한 대중적 호소력이 폭발한 것”이라며 “K-팝 역시 1920년대부터 누적된 대중가요의 토대 위에서 탄생한 음악”이라고 설명했다. 정책 전문가로서 ‘한류’의 생명력 연장을 위해선 K-팝에 K-트로트까지 가세해야 한다는 조언도 곁들였다. “대형 기획사들이 아직은 트로트에 주목하지 않는데, 한정된 ‘포트폴리오’로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50년 전에 트로트가 한류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도 있어요. 1961년 발표된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일본과 동남아에서 큰 사랑을 받았잖아요. 능력 출중한 기획사들이 세련된 K-트로트를 만들면 한국 대중음악이 세계를 ‘장기 집권’하게 될 겁니다.”

팬데믹 시대 문화정책에 대해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교육이 백년대계라면, 문화는 천년대계”라며 “감염병 사태 속 먹고사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문화정책은 언제나 뒷전”이라고 꼬집었다. “경제를 살리는 것도 좋고 자영업자를 돕는 것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순수·기초예술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문화 생태계가 벼랑 끝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대중문화’를 넘어선 제2, 제3의 한류를 일으켜야 한다고 제언했다. “대중문화에 이은 2단계로 ‘생활문화의 한류’가 필요합니다. 옷·음식·온돌 등 먹고 입고 자는 우리 삶의 방식을 세계에서 통용되는 양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마지막 과제는 ‘정신문화의 한류’입니다. 이는 세계인의 삶을 이끄는 사상과 이념을 확산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년 전부터 위대한 문명을 건설한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것 역시 ‘정신문화 부흥’에 작은 보탬이 될 만한 역할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왕조들, 그리스·로마, 영국 등은 무력과 경제력만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게 아닙니다. 문화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의식과 사상의 한류가 일어나면 그토록 열망하던 ‘일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것입니다. 방탄소년단(BTS)이 세계를 휩쓸고, ‘기생충’이 칸과 아카데미를 석권한 모습을 보세요. ‘경제 기적’과 ‘정치 기적’에 이은 ‘문화 기적’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우리에겐 충분한 역량이 있습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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