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분 사회, 헌법 정신에 길을 묻다 - ⑨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자발적 팬덤정치 시작은 ‘노사모’
이후 ‘MB연대’ ‘박사모’등 등장
현재 ‘문파’ ‘태극기부대’ 대표적
黨지도부 등 선출에 막강 영향력
임기말 文정부 지지율 떨어지며
진영내부 향한 공격 두드러지고
대선주자 팬클럽간 신경전 가열
무조건적 충성심·분노표출 한계
다양한 의견 억압하고 분열 초래
#1. “문재인 대통령‘님’을 보필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직장인 박모(43) 씨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는 문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박 씨는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과 네이버 카페, 진보 커뮤니티 클리앙 등 4개의 온라인 채널에서 문 대통령 지지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방탄소년단(BTS) 곁에 팬클럽 ‘아미’가 있다면, 문 대통령에게는 박 씨처럼 ‘문파’를 자처하는 지원군이 있는 것이다. 박 씨는 이른바 ‘태극기 부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일베’들과 몰려다니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퍼뜨리고 있다”며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했다.
#2. 다른 직장인 임모(34) 씨는 박 씨와 정반대로 “문재인 정부는 무능하고 악의적이며 쇼맨십에만 의존하는 역대 최악의 정권”이라고 평했다. 임 씨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오픈 채팅방이나 온라인 카페에 들어가 현안 관련 정보 교류와 토론에 임하거나 문 대통령을 비판하고 역대 보수 정부 대통령을 지지하는 내용의 기사를 공유한다. 지난 2019년 이후 태극기 집회에도 여러 번 참가했다는 임 씨에게 ‘문파’에 대한 생각을 묻자 “‘문빠’들은 선동이나 일삼는 중우(衆愚)정치 세력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돌아왔다. 그는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에 거부감을 보이는 ‘문빠’들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와 국민은 이들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국민의 적극적인 주권 행사는 바람직하지만, ‘조직화한 소수’가 과잉대표되면서 여론이 왜곡되고 사회가 극단적 대결로 치닫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앞에 ‘참여민주주의는 만능인가’ ‘국민주권은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가’ 하는 헌법 정신에 대한 질문이 놓여 있는 것이다.
◇‘빠 현상’에 사로잡힌 한국 정치 = 팬덤은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과 땅과 영지, 지위를 뜻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다. 특정 인물이나 사물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집단 또는 현상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정치 팬덤의 기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산악회(민산)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연청)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는 정치조직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일반 대중의 광범위하고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 팬덤 정치의 시작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노사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큰 공을 세우면서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유력 대선주자의 팬클럽이 잇따라 등장했다. ‘MB연대’와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이 각각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원했다. 현재 영향력을 떨치는 팬덤은 ‘젠틀재인’ ‘문사모’ 등을 거쳐 형성된 문 대통령 지지 세력 ‘문파’, ‘박사모’가 박 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으며 확장된 ‘태극기 부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각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당원 조직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숫자도 많지만 조직력이 막강한 이들은 당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나 공직 후보자 공천 과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들의 일탈적 행태가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파’들은 지난해 12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처리를 저지하려는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문자 폭탄’과 ‘18원 후원금(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에게 후원금 18원을 보내고 나서 후원금 반환이나 기부금 영수증 발행을 요청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날렸다. 2019년 12월에는 ‘태극기 부대’ 수천 명이 국회 본관에 난입해 아수라장을 만들기도 했다. 2019년 8월 검찰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비리 의혹을 수사할 때에는 서울 서초동에서는 ‘조국 지지’ 시위가, 광화문 일대에서는 ‘조국 규탄’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의 집단행동에 정당과 정치인들도 몸을 낮추는 상황이다.
◇다가오는 대선, 심화하는 ‘팬덤 정치’ = 코로나19 사태로 집회 제한 조치가 장기화하면서 ‘문파’나 ‘태극기 부대’의 장외 집단행동은 크게 줄었지만, 온라인상에서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특히 정책 실패 사례가 쌓이고 문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양측은 점점 더 목소리를 키우는 양상이다. 특히 최근에는 진영 내부를 향한 공격도 두드러진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를 향한 ‘문파’들의 공세가 대표적이다. 송 대표가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민심경청 프로젝트’ 대국민 보고 행사에서 조 전 장관 일가 비리 의혹과 박원순·오거돈 전 서울·부산시장 성추행 사건, 한국토지주택공사(LH) 땅 투기 의혹 등 불공정 논란을 낳은 사건들에 대해 사과하자 강한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젠틀재인’ 게시판에는 “(송 대표를) 탄핵할 수 없느냐” “당 대표 소환 서명운동이라도 벌이자”는 게시글이 쏟아졌다. 트위터에서는 ‘민주당은 버려도 조국은 못 버린다’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줄지어 올라왔다. 대선을 관리할 새 지도부를 뽑고 있는 국민의힘에서도 극성 지지층의 일부 행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대선을 약 9개월 앞두고 차기 대선주자들의 팬클럽이 재정비에 나서고 새로운 주자들을 지원하는 팬클럽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여권에서는 이재명 경기지사를 지원하는 ‘재명투게더’와 ‘이재명 지지자 모임(이지모)’,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를 지지하는 ‘낙연포럼’과 ‘여니사랑’, 정세균 전 국무총리를 미는 ‘우정(우리가 정세균이다) 특공대’ 등이 있다. 야권에서도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지지모임 ‘안철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안사모)’,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의 팬클럽 ‘유심초’ 등이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다. ‘윤석열을 사랑하는 모임(윤사모)’이 이미 회원 2만 명을 넘어섰고, 최재형 감사원장의 팬클럽도 생겨났다. 대권을 향한 경쟁이 시작된 만큼 이들 정치인 팬클럽 간의 신경전도 갈수록 가열되는 양상이다.
◇“목소리 큰 소수의 지배 경계해야” = 진영을 떠나 ‘빠 현상’은 자신이 선호하는 특정 정치인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을 드러내거나 상대 진영에 대한 무조건적·감정적인 분노 표출에 그치는 한계를 보인다.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 대화나 타협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꼬리가 몸통을 흔들듯, 국회와 정당이 소수 극렬 지지층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왝더독(Wag the Dog·주객전도)’ 현상이 심화한다.
이에 따라 참여민주주의를 절대선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 헌법이 규정한 국민주권 원칙은 모든 국민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대의제의 장점을 살리면서 한계를 보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목소리 큰 소수가 사회를 지배하고 분열시키는 현상을 만들어내면서 오히려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이 평등하게 표출될 기회를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에게 사회 갈등을 적절하게 타협하고 조정할 수 있는 정치적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라며 “이는 특정한 소수가 함부로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방지하고 모든 국민이 지닌 동등한 주권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선거 때에는 극렬 지지층의 표심을 얻어 의석이나 정권을 장악할 수 있더라도 이후 국정을 운영하면서 지지자들의 눈치를 본다면 소신 있는 정치인들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지영 기자 goodyoung17@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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