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분 사회, 헌법 정신에 길을 묻다
선거 통해 당선된 국민의 대표
민의 100% 대변 못하는 한계
진영의 善 위한 정치에만 빠져
국회의원 ‘자유위임원칙’ 변질
위기의 대의제도 보완요구 커져
靑국민청원으로 의견 내보지만
국가의사결정에 모두 반영 못해
비례대표제 등 선거제 개혁필요
IT 활용 ‘新직접민주주의’ 부상
기술 통한 참여민주주의도 대안
정치적인 면에서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왕 또는 소수 귀족·부유층이 아니라 ‘국민(demo)’에 의해 국가가 ‘지배(kratos)’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던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의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이 민주주의의 함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거나 자신의 뜻이 국가 운영에 충실히 반영되고 있다고 실감하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 국가 지배 혹은 통치는 선거로 뽑은 대표자 등에게 주권을 위임하는 대의민주주의, 즉 간접 지배형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위임자인 국민 다수가, 헌법 정신과 달리 자신이 제대로 대변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온라인과 광장에서 현대판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국민과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이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루소와 달리, 그에 앞서 17세기 영국 사상가 존 로크는 ‘주권을 위임하는 원리’를 주장했다. 로크는 자연 상태의 잠재적인 투쟁 상태를 극복하고 개인의 생명·재산·안전 등을 보호하기 위한 계약으로서 국가를 창설하고, 개인이 지니는 주권 일부를 국가에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주권을 위임받은 국가나 국민의 대표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한다면 국민은 위임 계약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저항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봤다. 로크의 이 같은 저항권 사상은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시민혁명의 이념적 기틀이 됐으며, 이들 국가는 근대적 성문헌법을 세우고 권력분립을 통해 의회를 구성했다.
◇대의제의 한계 = 근대 이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 방편으로 대의민주주의가 정착됐지만, 주권 위임자인 국민과 수탁자인 대의기관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이어져 왔다. 우선 대의제는 대표성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가령 소선거구제를 택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투표자의 절반보다 단 한 표만 더 받아도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만18세 미만 국민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으며, 투표권이 있는 유권자가 모두 투표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후보가 난립할 경우 지역구민 전체 25% 정도의 지지만으로도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다. 시작부터 75%의 국민이 배제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나라에 따라 정도 차는 있지만, 주요 정당의 공천이 50대 이상 고학력 남성 전문가 위주로 이뤄지고,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이 쉽지 않은 것도 대표성 논란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젊은층과 여성, 저학력자, 블루칼라 계층 등은 피선거권 면에서 소외될 뿐 아니라 의회 내에서 제대로 대변되기도 어렵다.
또 선거로 뽑힌 국민의 대표는 국민주권주의에 따라 국민 전체의 이익, 즉 공공선(公共善)을 구현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자신을 뽑아준 선거구 유권자나 국민의 뜻에 전적으로 예속되지 않는 ‘자유위임 원칙’이다. 우리 헌법도 46조 2항에서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이라도 자기 지역구의 이익만 고집해선 안 되고 전체적으로 국가 이익을 증진하는 쪽으로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 일반이 아닌 개별 국민 입장에서는 자신이 제대로 대변되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루소가 “시민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선거 기간에만 자유를 누릴 뿐이고 대표자를 선출한 후에는 그 대표자의 노예가 돼버린다”고 말한 것은 이 같은 대의제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더욱이 국민의 대표자가 ‘공공선 구현’이라는 기본 책임을 망각하고 이른바 ‘진영의 대변자’로 나설 경우 국민 일반과의 긴장은 더 높아진다.
◇‘직접 행동’ 의 한계 = 최근 전 세계적으로 시민들이 정치적 대리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서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 그야말로 참여민주주의의 시대다.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의회가 주권자 국민과 무관한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됐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다. 특히 정보기술(IT) 발달과 SNS 보편화로 시민들의 조직화는 갈수록 용이해지고 있다.
참여민주주의나 직접 행동 면에서 한국은 첨단을 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마련한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정치권이 미처 다루지 못한 이슈나 각종 억울한 사연 등에 대한 국민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한다. 때로는 수십만∼수백만 명의 동의를 얻은 청원이 제도 개선이나 정부의 대응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유력 정당이나 정치인의 팬클럽을 중심으로 한 일반 시민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는 사례도 갈수록 늘고 있다. SNS로 조직화한 이들은 이미 각 당 지도부 선출과 공천 등 주요 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당 지도부와 국회의원들도 이들을 무시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국민의 뜻’을 직접 표출하는 것이 공공선 구현에 무조건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 한 명, 한 명의 정돈되지 않은 의견을 모두 국가의사 결정에 반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대의제가 (일부 정치인의) ‘그들만의 리그’인데, 이것에 긴장감을 준다는 면에서 직접민주주의가 갖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며 “반면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처럼 직접민주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의 부작용이나 ‘빠 현상’ 같은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기술혁신과 대의제 진화 = 전문가들은 IT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을 직접민주주의로 급격히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직접민주주의는 ‘심의 기능’이 없기 때문에 국민이 직접 뭘 하겠다는 것은 국민 가운데 ‘목소리 큰 사람’이 상황을 지배하고 사회를 분열시킬 우려가 있다”며 “대의제를 민주적 가치로 발전시키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권자인 국민의 참여 욕구를 외면한 채 고전적 대의제를 고집할 수도 없다. 이효원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국민주권주의를 그대로 실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국민 주권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정치학계와 법학계 등에서는 이미 대의제를 보완하기 위한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우선 국민의 뜻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쪽으로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중·대선거구제와 석패율제 도입,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 도입 등 사표(死票)를 최소화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비례대표 확대와 직능대표제 도입 등을 통해 다양한 국민의 대변자가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 입성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4차 산업혁명으로 혁신적인 기술들이 개발되고 있는 현 상황도 대의제 위기 극복과 새로운 형태의 직접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전통적 대의제에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보다 많이 반영하는 시스템을 참여민주주의로 표현하기도 한다. 각종 신기술을 통해 국민이 국정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접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더 쉽게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무제한 수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경계감이 남아 있다. 변덕스럽고 합리적이지 못한 정치적 의사 표현이 난무함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위험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법학자는 “IT 발달이나 전자투표제도 활성화로 민주주의의 수준을 높여갈 가능성은 있다”면서도 “그러나 심의나 설득, 타협의 과정이 없는 직접민주주의는 여론의 ‘쏠림 현상’ 같은 부작용 위험이 크기 때문에 헌법학계에서도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신중론자가 많다”고 말했다.
박준희 기자 vinke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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