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분 사회, 헌법 정신에 길을 묻다 - ⑪ 시장경제와 정부 개입
기업을 적폐청산 대상으로 보는
진영 논리로 ‘경제민주화’ 접근
‘공정경제 3법’ 등 규제 일변도
지난해 정부입법 규제 1009건
기업 활동 위축으로 고용 감소
재정으로 일자리 채워 악순환
재난지원금·기본소득 등 남발
재정 건전성 무시한 포퓰리즘
경제 활력 갈수록 떨어지는데
시장경제 제쳐 두고 정부 개입
사회 복지만 폭발적으로 늘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공영운 현대자동차 사장,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사장, 존 림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장 등 한국 기업인들이 일어서자 참석자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이는 미국에 총 44조 원을 투자키로 한 삼성·현대·LG·SK 등 기업이 이번 정상회담이 예상을 뛰어넘은 성과를 거두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기업인들을 향해 “생큐(Thank you)”를 세 차례 반복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등은 “한·미 공동성명에 한국 측의 요망이 폭넓게 반영됐다”면서 “한국 기업이 40조 원대 대미 투자를 한 대가”라고 보도했다.
국내로 눈을 돌리면 기업들의 상황은 정반대다. 여전히 개혁과 규제 대상으로 치부되는가 하면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농단 사태가 보여주듯, 정치권에 돈을 대주는 ‘캐시 카우(cash cow)’쯤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특히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건 문재인 정부 들어 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경제민주화 관련 정책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된 헌법 119조 2항을 근거로 한다. 전문가들은 이 조항이 취지 면에서는 옳지만 “진영 논리에 의해 국내에서 ‘기업 적폐 청산’과 ‘정부 개입 만능주의’의 근거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적폐 취급받는 기업들 =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이 조금 지난 2019년 7월, 블룸버그 통신에 도발적인 칼럼이 실렸다. 아시아 경제담당 칼럼니스트 슐리 렌이 “문 대통령의 사회주의 실험이 한때 활기가 넘쳤던 한국경제의 야성을 앗아갔다”고 비판한 것이다. 여권 인사들은 발끈했지만, 집권 4년이 지난 현재 상황은 더 나빠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소위 ‘공정경제 3법(상법, 공정거래법, 금융복합기업집단감독법)’은 ‘기업 규제 3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밖에도 산업안전보건법, 화학물질관리법, 중대재해처벌법 등 현 정부 들어 강화되거나 새롭게 만들어진 기업 규제 법안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14일 “경제민주화의 참담한 결과”라면서 “이렇게 기업을 규제하는 나라가 어디 있을까 싶다”고 꼬집었다.
한국에서 정부가 기업에 시시콜콜히 간섭하는 일은 전혀 낯설지 않다.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본격화한 경제 성장이 정부주도형으로 이뤄진 탓이다. ‘한강의 기적’ 이면에는 정부의 과도한 개입과 정경 유착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셈이다. 1988년 5공 비리 청문회와 2016년 국정농단 청문회 등에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불려 나온 것은 이런 흑역사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한국 경제 규모가 세계적 수준으로 팽창하고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진 뒤에도 정부와 정치권의 ‘개입 본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정부가 ‘규제 혁파’와 ‘기업 자율성 확대’를 외쳤지만, 대부분은 말뿐이었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도 ‘적폐 청산’을 앞세운 문재인 정부에서 시간이 갈수록 규제는 강해지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올해 초 내놓은 ‘규제개혁위원회 규제심사 결과 분석’ 자료에 따르면 2020년 한 해에만 정부 입법으로 인해 신설된 규제가 1009건, 강화된 규제가 501건에 달했다. 신설·강화 규제 건수는 전년보다 55.0% 늘었다. 이 때문에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보다 기업 환경이 더 나빠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떨어지는 경제 활력 = 규제로 인한 기업 활동 위축은 민간 일자리가 줄어들고 공공 부문이 그 자리를 채우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한국의 청년 일자리 감소는 두드러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청년실업률(15~29세)이 증가한 6개국 중 한국의 상승폭(+0.9%포인트)은 재정위기를 겪은 그리스(+10.1%포인트)와 이탈리아(+4.0%포인트)에 이어 3위였다.
기업의 빈자리는 정부 재정이 채우는 결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9년 공공부문계정’에 따르면 정부와 공기업 등 공공부문의 총지출은 862조4000억 원으로 역대 최고치였다. 전년 대비 증가율은 7.9%에 달했으며 국내총생산(GDP)에서 공공부문 총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44.9%로 2013년(45.4%) 이후 6년 만에 가장 높았다. 민간 부분에서 떨어진 경제 활력을 정부 지출로 메우려 했다는 의미다.
이런 가운데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 확대가 과연 최선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된다. 특히 비효율이 문제다.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실이 문재인 정부 출범 전인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36개 전체 공기업의 경영정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공기업의 영역이익이 69.9%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임금·복리후생비·퇴직급여 등 직원에게 주는 인건비는 20.6%나 늘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해진 오늘날 과거와 같은 방식의 공공중심 경제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늘어나는 복지 = 경제민주화 기조는 기업 규제뿐 아니라 사회복지의 폭발적 증가로도 이어지고 있다.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하는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충격이 겹치면서 복지가 늘어나는 것은 전 세계적인 추세다. 그러나 정부 재정 건전성이 극도로 악화할 정도로 복지가 늘어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GDP 대비)은 2019년 37.7%에서 올해 48.2%로 2년 만에 10%포인트 이상 급증했다. 2024년에는 59.7%까지 치솟으며 60%를 넘어설 기세다. 과거 연간 상승률이 2%포인트를 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우려되는 수준이다. ‘국민 위로 지원금’을 위해 2차 추가경정예산을 추진할 경우 국가채무 비율 60%를 넘어서는 시점은 당겨질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과거에는 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보편 복지나 현금성 복지 등이 이제는 제대로 된 토론조차 없이 남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국면에서 기본소득에 관한 사회적 논쟁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재난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기본소득이 반복 지원되고 있다. 이는 기본소득과 같은 현금성 복지가 가능하리라는 인식이 확산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내년 3월 9일로 다가오면서 정치권이 재정 건전성은 젖혀둔 채 경쟁적으로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낼 우려도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기본소득 정책이다. 이재명 경기지사의 기본소득론은 최종적으로 전 국민에게 연간 600만 원씩을 나눠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한 재원은 한 해 30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올해 정부 예산(본예산 기준)에 편성된 총지출이 555조8000억 원이니, 한 해 예산의 절반이 넘는 돈이 필요한 셈이다. ‘제대할 때 사회출발자금 3000만 원(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회 초년생에게 1억 원(정세균 전 국무총리)’ 등 기본소득과 유사한 제안들이다. 이에 대해 야권에서는 ‘안심소득(오세훈 서울시장)’ ‘공정소득(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 등을 제시하며 맞불을 놓은 상태다.
임정환 기자 yom724@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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