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본 지상파 드라마. 결혼 15년 차 아내와 헤어지는 40대 중반의 변호사 남편이 내세운 놀라운 이혼 사유. 그것은 집에서 아침밥을 얻어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맞벌이 부부가 대세인 오늘날 세태는 변했다. 하지만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아침 한 끼. 이는 많은 한국 남자의 아련한 로망일 것이다.
42년간 나의 결혼생활을 뒤돌아보니 살아온 게 기적이었다. 특히 퇴임 후 12년 동안 아내는 가정을 치열하게 지켜냈다. 그 사이에 두 아이는 결혼해 독립했다. 남편인 나는 가정 경제에 무심했고 무능력했다. 위수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세월을 낚는 강태공처럼 자신의 절차탁마에만 관심이 있었다. 물론 설거지와 청소 등 가사분담은 기본이다.
책만 읽는 무심한 남편을 보며 아내는 스스로 노후의 자구책을 찾았다. 뒤늦게 본인의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취미활동으로 개발, 시간을 선용한다. 내핍생활을 이겨내며 동대문시장에서 천이나 가죽을 저렴하게 구입해 계절별로 옷이나 가방을 만들어 입거나 들고 다닌다. 놀라운 솜씨다. 가끔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선물하며 소통한다.
각종 액세서리류도 만드는데 손으로 만드는 일에 재능이 있다. 국내뿐 아니라 스페인·일본 등 외국의 유튜브를 보며 최신 유행도 연구한다. 취미생활에 쏟는 아내의 집중도와 도전정신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정식으로 공부하도록 진작 후원했더라면 나보다 더 큰 성취를 이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용에도 관심이 많아 내가 실습용 모델을 자청했다. 이발소에 안 가니 상호 윈윈이다. 아내는 함께 외출하는 날이면 내 얼굴을 유심히 보며 미소를 짓는다. ‘문제아 남편이지만 아직도 좋아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본인이 자른 머리를 확인하고 흡족해하는 회심의 미소란 것을 알았다.
신혼 초 어느 날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아내가 신문 스크랩을 내밀었다. 5공화국 정부가 88올림픽을 앞두고 야심차게 추진한 통역대학원을 홍보하는 특집기사였다. 이 기사가 내 인생 항로의 방향을 틀었다. 다니던 직장 외환은행(지금의 하나은행)에 사표를 던졌다.
이후 비싼 이자를 준다는 건축업자의 말에 속아 퇴직금을 날렸다. 원금을 돌려받겠다고 갓 돌이 지난 딸아이를 업고 아내는 업자의 집을 수없이 찾아다녔다. 버스를 타고 1시간이 훨씬 넘는 거리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40이 넘은 딸아이에게 늘 미안하다고 한다. 이렇다 할 수입도 없이 내 공부를 뒷바라지한 당시 아내의 입장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이 간다. 당시 이문동의 한국외국어대학교 근처로 이사를 갔는데 난방이 되지 않는 집이라 2년여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아내는 열심히 도시락을 싸주었다. 대학원 2년 차 일본의 연구소에 파견 나갈 때는 정착금 마련을 위해 결혼 패물을 내놓았다. 아내는 평생을 남편 공부시키려 시집을 온 것 같다고 말한다.
세상을 떠나는 날 자녀들을 머리맡에 불러놓고 나는 단단히 아내를 부탁하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와 가장 사랑한 사람은 이영화 당신이다. 당신 덕분에 참 잘 살았다”라고 미안함과 감사의 마음도 함께 고백할 것이다.
허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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