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크리스마스 때마다 하는 성극 무대에 섰다. 작은 역할이었지만 이는 훗날 ‘대배우 신영균’의 탄생을 알린 서막이 됐다. 한성고 재학 시절에도 연극부에서 활동했다. 졸업한 뒤에는 ‘청춘극장’에 입단해 2년 동안 신극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쪼들렸고, 비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연극은 취미로 하고,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생계에 대한 고민으로 잠시 꿈을 접고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했고, 해군 군의관 시절 만난 아내와 결혼한 뒤 치과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어 연극 ‘여인천하’ 무대에 올랐다가 당시 조긍하 감독의 눈에 띄어, 1960년 영화 ‘과부’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데뷔 2년 만에 영화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빨간 마후라’로 제11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갯마을’ ‘미워도 다시 한번’ 등 한국영화사의 주옥같은 작품 300여 편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톱스타로서 196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를 함께 누렸다. 특히 ‘폭군 연산’ ‘대원군’ ‘세종대왕’ ‘세조대왕’ 등에서 임금으로 활약해 ‘임금 전문 배우’로도 명성을 날렸다.
1978년 영화 ‘화조’를 끝으로 배우로서는 잠정 은퇴했으나, 이후 한국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역 시절 각종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인기스타상 등을 휩쓴 그는 1987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2011년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금호극장, 명보극장을 인수하고, 명보제과를 직접 운영하는 것은 물론, 신스볼링, 한주흥산 등을 설립해 사업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1996년에는 정치에 입문해 제15·16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신 명예회장은 치과의사, 정치인, 사업가, 배우 등을 해봤지만, 그중에서 한 가지만 택하라고 하면 배우를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박현수 인물팀장 phs2000@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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