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러 겨냥한 나토 성명도 수용
막말없이 긍정적 분위기로 회담
독설했던 마크롱엔 “협력 가능”
최악 경제상황·리더십 위기 속
서방 투자 위한 우호적 제스처
강대국 정상들을 향해 거친 언사를 쏟아내며 21세기 ‘술탄’(이슬람 세계에서의 최고 권위자)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해 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기세가 한층 꺾인 모양새다. 14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국·프랑스·그리스 등 대립 관계에 놓인 주요국 정상들과 대면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자극적인 발언을 자제하고 현안에 대한 언급을 삼간 채 밀월 관계인 중국·러시아를 겨냥한 나토의 공동성명까지 용인했다. 이 같은 태도 변화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거치며 최악으로 악화한 국내 경제 상황과 맞물린 에르도안 대통령의 리더십 위기에서 기인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와 연쇄적으로 비공개 양자 회담을 했다. 안보·경제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갈등했던 주요국 정상들과 대면한 자리에서 그의 ‘막말’은 없었다. 수백 년에 걸친 앙숙 관계인 그리스와는 “(동지중해 해양 경계 문제에 관한) 지난해의 갈등은 접어두고 긍정적인 분위기에서 긴장을 깨는” 회담이 이뤄졌으며, 에르도안 대통령 본인이 “미초타키스 총리와 핫라인을 개설할 계획이며, 올해는 그리스-터키 관계에서 조용한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종교 문제를 두고 한때 독설을 퍼부었던 마크롱 대통령과의 만남 후에는 “시리아·리비아 내전 문제를 해결하는 데 프랑스와 협력할 수 있다”고 알렸다.
터키 전신인 오스만제국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인정, 러시아제 S-400 지대공 미사일 도입 문제 등 최근 갈등이 표면화되며 가장 주목받았던 바이든 대통령과 만난 후엔 “양국 관계에서 풀 수 없는 문제는 없다”며 한층 전향적인 입장을 내놨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을 터키로 초청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바이든 대통령이 부통령이던 시절부터 여러 차례 대면했지만, 국가 원수로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국 일간 더선 등에선 나토 정상회의 현장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다가가 ‘어색한’ 주먹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포착하며 두 사람 간 미묘한 긴장 관계를 조명하기도 했다.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부채 위기 수준으로 급락한 리라화 가치 등 국내 상황을 고려할 때 에르도안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입지 회복을 위한 미국과의 정치·경제적 관계 강화가 절실하다. 관광 산업 의존도가 높은 터키는 최근 동지중해 가스 탐사 활동을 취소하고 러시아와 대립 관계인 우크라이나·폴란드에 무인기를 수출하면서 서방국들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해 왔다. 다만 실질적인 호응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터키와 서방국 간 “불편한 관계를 해소할 돌파구는 없었다”고 로이터통신이 평가했다.
장서우 기자 suwu@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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