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개헌 사례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제정 이래 9차에 걸쳐 개정됐다. 1987년 개정 후 34년째를 맞고 있는 현행 헌법도 시대에 맞게 다시 손봐야 한다는 개헌론이 수시로 제기된다. 그러나 개헌이 매번 헌법 조항을 더욱 합리적으로 다듬어 헌법 정신을 충실히 구현하는 작업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위헌 결정을 받은 법률 조항을 오히려 헌법 조항으로 격상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실제로 있었다. 그 때문에 앞으로의 개헌 논의에서는 이런 악습을 배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설치되기 전인 지난 1971년 6월, 군경의 직무상 부상·사망에 대한 이중배상금지를 규정한 국가배상법 2조에 대해 대법원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정부로서는 베트남 전쟁에 파견된 군인들에 대한 배상 부담이 커지는 결정이었다. 같은 해 7월 박정희 정부는 일부 법관의 비리 혐의 수사에 착수했다. 법관들은 이를 위헌 결정에 따른 ‘사법부 길들이기’라고 판단해 집단 사의 표명으로 대응했다. 이른바 1차 사법파동이다. 결국 법관 수사와 법관들의 집단 사표는 유야무야됐지만, 박정희 정부는 위헌 결정을 받은 법률 조항을 아예 헌법에 적시하는 개헌을 추진했다. 또 헌법위원회를 설치해 대법원의 위헌 법률 심판 기능을 폐지했다. 1972년 박정희 정부의 ‘유신 개헌’(7차 개헌) 때 일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이뤄진 개헌 가운데 상당수는 집권 세력의 이해관계를 위한 조항 짜 맞추기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인 현행 헌법(10호 헌법)마저도 “여야 합의로 만들어진 최선의 성과물”이라는 평가와 “당시 정치적 상황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비판이 병존한다.
개헌의 내용 측면에서 유신 개헌이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길을 열어놔,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사실상 폐기 처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8호 헌법, 소위 ‘유신 헌법’은 위헌 결정을 받았던 이중배상금지 조항뿐만 아니라 정권의 친위·관제 기구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접 선출, 대통령 긴급조치권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절차적 측면에서 최악의 개헌 사례로는 이승만 정부의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2차 개헌)’이 꼽힌다. 이승만 정부 역시 장기 집권을 위해 1954년 11월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을 추진했다.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데는 재적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수점 단위로 구분되지 않는 의원 수를 사사오입으로 구분한 것은 억지 논리라는 것이 당시나 현시대 법학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전두환 정부는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체육관 선거’를 도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모호한 의미의 행복추구권을 삽입해 선의의 개헌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박준희 기자 vinkey@munhwa.com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제정 이래 9차에 걸쳐 개정됐다. 1987년 개정 후 34년째를 맞고 있는 현행 헌법도 시대에 맞게 다시 손봐야 한다는 개헌론이 수시로 제기된다. 그러나 개헌이 매번 헌법 조항을 더욱 합리적으로 다듬어 헌법 정신을 충실히 구현하는 작업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위헌 결정을 받은 법률 조항을 오히려 헌법 조항으로 격상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실제로 있었다. 그 때문에 앞으로의 개헌 논의에서는 이런 악습을 배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설치되기 전인 지난 1971년 6월, 군경의 직무상 부상·사망에 대한 이중배상금지를 규정한 국가배상법 2조에 대해 대법원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정부로서는 베트남 전쟁에 파견된 군인들에 대한 배상 부담이 커지는 결정이었다. 같은 해 7월 박정희 정부는 일부 법관의 비리 혐의 수사에 착수했다. 법관들은 이를 위헌 결정에 따른 ‘사법부 길들이기’라고 판단해 집단 사의 표명으로 대응했다. 이른바 1차 사법파동이다. 결국 법관 수사와 법관들의 집단 사표는 유야무야됐지만, 박정희 정부는 위헌 결정을 받은 법률 조항을 아예 헌법에 적시하는 개헌을 추진했다. 또 헌법위원회를 설치해 대법원의 위헌 법률 심판 기능을 폐지했다. 1972년 박정희 정부의 ‘유신 개헌’(7차 개헌) 때 일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이뤄진 개헌 가운데 상당수는 집권 세력의 이해관계를 위한 조항 짜 맞추기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인 현행 헌법(10호 헌법)마저도 “여야 합의로 만들어진 최선의 성과물”이라는 평가와 “당시 정치적 상황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비판이 병존한다.
개헌의 내용 측면에서 유신 개헌이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길을 열어놔,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사실상 폐기 처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8호 헌법, 소위 ‘유신 헌법’은 위헌 결정을 받았던 이중배상금지 조항뿐만 아니라 정권의 친위·관제 기구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접 선출, 대통령 긴급조치권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절차적 측면에서 최악의 개헌 사례로는 이승만 정부의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2차 개헌)’이 꼽힌다. 이승만 정부 역시 장기 집권을 위해 1954년 11월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을 추진했다.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데는 재적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수점 단위로 구분되지 않는 의원 수를 사사오입으로 구분한 것은 억지 논리라는 것이 당시나 현시대 법학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전두환 정부는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체육관 선거’를 도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모호한 의미의 행복추구권을 삽입해 선의의 개헌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박준희 기자 vinke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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