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 대선 D-1… 후보 대부분 ‘보수파’
원유수출 차단 등 美제재로 이란 경제난 심화
작년 우크라 민간항공기 격추 뒤‘반정부 시위’확산
위기감 느낀 하메네이, 중도·개혁파 탈락시켜
사법부 수장 라이시, 지지율 55.6%로 압도적 선두
이스라엘 새 정부도 강경파…‘강 대 강’대치 우려
혁명수비대 관할 호르무즈 해협 긴장감도 더 커질듯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의 줄임말)’
고를 후보가 없어 보인다. 한국 선거 얘기가 아니다. 오는 18일 이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4명의 후보는 대부분 강경·보수 성향으로 채워졌다.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후보는 성직자이자 현직 사법부 수장인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55.6%·8일 조사)다. 두 번째로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후보는 혁명수비대 출신 모센 레자에이(5.5%)다. 중도·개혁 진영 후보들은 대부분 헌법수호위원회에서 ‘컷오프’당했다. 이란은 헌법수호위가 지원자를 검증해 후보 자격을 주는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다. 사실상 헌법수호위가 강경·보수 대통령을 찍은 셈이다.
헌법수호위의 이 같은 결정에 이란 국민은 대선 보이콧(거부운동)으로 맞설 기세다. 현지에서는 역대 대선 중 가장 저조한 투표율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서방 언론들의 비난도 거센 상황이다. 헌법수호위는 왜 이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이에 대해 이란 강경·보수 진영의 짙은 위기감이 배경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 체제를 보위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라는 의미다.
◇강경·보수 일색인 대통령 후보 = 지난 5월 헌법수호위는 7인의 대선 후보를 발표했다. 그중 5명이 강경·보수 후보였고 2명이 중도·개혁 성향의 후보였다. 특히 개혁 성향의 에스하그 자항기리 수석 부통령, 알리 라리자니 최고지도자 고문(중도 성향),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의회 의장은 최종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모두 중도·개혁 성향 유권자의 지지가 높은 정치인들이다. 이는 헌법수호위가 전과가 없고 석사 학위 이상을 소지한 지원자 592명 중 선발한 결과다. 대선을 하루 앞둔 현재는 3명의 후보가 사퇴해 강경·보수 3 대 중도·개혁 1이 됐다.
헌법수호위 위에는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헌법수호위 12인을 선발한다. 헌법수호위는 사실상 그의 손아귀에 있는 조직이다. 신정국가인 이란에서 성직자인 종신 최고지도자는 군 통수권과 외교권 등 대통령보다 많은 권한을 가진다. 이번 후보 선정 결과가 나온 뒤 오죽하면 하산 로하니 현 대통령이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에게 중도·개혁파 후보들을 살려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서방 언론들은 이 같은 상황을 비판하고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란 내 주요 정치인을 탈락시킨 헌법수호위의 후보 선정이 이란인의 정치 참여 폭을 좁혔고 강경보수 성향 라이시가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AFP통신도 “중도 성향 후보들을 실격시킴으로써 극도로 보수적인 라이시에게 승리의 길을 터줬다”고 논평했다. 더욱이 라이시의 라이벌인 로하니 대통령은 자격 제한으로 출마하지 못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2017년 라이시와 맞붙은 대선에서 승리해 연임에 성공했다. 이란 대통령은 1회 연임만 가능하다. 그의 임기는 8월까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지 언론들은 이번 대선 투표율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미 젊은층을 중심으로 대선 보이콧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AFP, 로이터 통신은 SNS상에 해시태그 ‘이슬람공화국 반대’(#NoToIslamicRepublic)를 단 투표 거부 글이 확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하메네이 최고지도자가 연설을 통해 연일 선거 참여를 강조하는 이유다.
◇강경·보수파의 위기 = 서방 언론의 비판과 자국민의 반발에도 이란이 강경·보수 일색 정치인들로 대선 후보를 채운 데는 이유가 있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중심으로 한 강경·보수파가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극심한 경제난이 원인이다. 2015년 이란은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 등 서방 주요 6국과 ‘이란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했는데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그 합의를 파기한 게 원인을 제공했다.
미국은 합의를 파기하며 이란의 원유 수출을 막고 이란 중앙은행과 국가개발펀드 등을 테러지원집단으로 지정해 타국과의 금융거래까지 제한했다. 이 같은 경제 제재로 이란의 물가상승률은 30%를 넘었고 실업률은 15%를 웃돌았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미국의 제재 복원 후 3년간 이란의 국내총생산(GDP)은 6% 감소했다. 이란 정부가 추산한 경제적 손실도 2500억 달러(약 279조4200억 원)에 달한다. 미국과의 가파른 대치로 경제가 메마르자 이란 체제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확산했다.
그러던 지난해 1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직속 부대로 평가받는 혁명수비대가 우크라이나 민간 항공기를 크루즈미사일로 오인, 사격해 탑승객 176명이 전원 사망하는 사고가 터졌다. 이 사건으로 1979년 이란 혁명 후 40년 만에 최고지도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전국을 뒤흔들었다. 혁명으로 집권한 정부에 반정부 시위의 확산은 두려웠다.
불길을 잡기 위해 헌법수호위는 사건 한 달 뒤인 2월 치러진 총선에서 중도·개혁 성향 후보를 배제했다. 당시 외신에 따르면 선거 출마 신청자 1만4000여 명 가운데 개혁 성향의 7296명이 심사에 걸려 출마가 좌절됐다. 심지어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현역 의원의 약 3분의 1인 90명도 심사에 걸려 출마하지 못했다. 선거 제도가 도입된 1980년 이후 탈락자 규모는 사상 최대치였다. 일부 정치인은 ‘집단 학살’이란 격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올해 대선에 나타난 강경·보수 일색의 후보군은 지난해 2월 총선을 통해 사실상 예고된 셈이다.
◇이스라엘과 ‘강 대 강’ 대치할까 = 마침 중동의 라이벌 이스라엘에서는 또 한 명의 강경·보수파가 집권에 성공했다. 바로 나프탈리 베네트 신임 총리다. 그는 총리 취임 일성으로 “이란에 대한 강경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JCPOA 복원에 대해서도 “세계에서 가장 어둡고 폭력적인 정권 중 하나에 다시 합법성을 부여하는 오류”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언뜻 봐도 이란의 강경·보수파 새 대통령과 ‘케미’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이미 최악이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11월 ‘이란 핵 개발의 아버지’라 불리던 핵 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 암살과 4월 나탄즈 지하 핵시설 폭파 배후로 지목받고 있다. 당시 이란의 사이드 카티브자데 외교부 대변인은 “이번 사건은 명백한 사보타주(고의적 파괴)”라며 “시온주의 정권(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란의 반격은 바로 진행됐다. 지난 4월 이스라엘 상선 하이페리온 레이호가 페르시아만에서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이스라엘 언론 채널12는 “이란의 소행”이라고 보도했다.
이란에서 강경·보수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전 세계 원유물동량의 3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감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 혁명수비대가 직접 관할한다. 지난 1월 한국의 ‘한국케미호’를 나포한 것도 혁명수비대였다. 당시 이란은 인질 석방 과정에서 미국의 제재로 국내에 동결된 석유 대금 70억 달러(7조8200억 원)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은 2019년 호르무즈 해협에서 영국 선박 ‘스테나 임페로호’를 나포,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도 했다.
임정환 기자 yom724@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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