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르니에리로 위압적 연주했던
파가니니의 뒤잇는 ‘기교파’
자유롭고 감각적인 연주 특징
재능 남달라 여덟살에 첫 연주회
스페인 이사벨라2세 여왕 감동
열살 아이에‘스트라디바리’선사
유럽·남북미투어 성공하며 명성
‘비르투오소(virtuoso)’는 ‘덕이 있는’ ‘고결한’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로 예술적 표현과 연주기교가 빼어난 명인 연주자를 이르는 말이다. 대표적인 비르투오소로는 ‘악마의 바이올린’으로 대변되는 파가니니를 들 수 있다. 그 뒤를 잇는 비르투오소가 스페인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1844∼1908)다.
파가니니와 사라사테는 전 음악사를 통틀어 최고의 바이올린 비르투오소로 여겨지는데 이 둘 사이에는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 명기 ‘과르니에리’를 사용해 선 굵고 위압적인 연주를 했던 반면 사라사테는 또 다른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해 우아하고 화려하지만 달콤하게 청중을 감싸 안는 자유롭고도 감각적인 연주를 추구했다. 파가니니가 나르시시스트적 천재형이라면 사라사테는 우직한 노력형이었다. 사라사테의 천재적인 연주에 모두 ‘바이올린 천재’라고 칭송하자 그가 내놓은 답변이 흥미롭다. “천재? 37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14시간씩 연습했는데 나를 천재라고 부르다니.”
사라사테는 1844년 3월 10일, 스페인의 북동부에 위치한 팜플로나에서 태어났다. 5세 때 군악대 출신의 아버지로부터 첫 바이올린 수업을 받은 그는 시작부터 남다른 재능을 드러냈고, 8세에 이미 자신의 첫 리사이틀을 열 수 있을 정도였다. 이 공연에서 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한 부유한 음악애호가는 사라사테가 마드리드에서 본격적인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후원해 줬다. 그의 재능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이름은 여왕 이사벨라 2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궁으로 초청된 사라사테의 시연을 듣고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음악성에 탄복한 여왕은 그 자리에서 10세의 바이올린 신동 사라사테에게 1713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하사했다. 2년 후인 1856년에는 여왕 이사벨라 2세가 하사한 장학금으로 유럽 음악계의 본진인 파리국립음악원에 입학해 장 달팡 알라르를 사사했다. 17세에는 파리음악원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졸업하고 드디어 전문 연주자로서 콘서트 투어를 시작했다.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 투어는 유럽 전역을 향했고 남·북아메리카에까지 이른 연주여행은 대성공을 거두며 명성을 떨치게 된다.
연주여행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사라사테는 자신의 가장 열렬한 팬이자 후원자인 이사벨라 2세 여왕을 알현해 투어 이후 한층 더 원숙해진 연주를 들려줬다.
감동한 여왕은 큰 상을 내리고 싶었고 원래 20세 이하의 사람에게는 수여할 수 없는 규칙까지 위반하면서 ‘카를로스 3세 성십자상’을 17세의 비르투오소 사라사테에게 수여했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오늘의 추천곡
- 지고이네르바이젠
사라사테가 직접 작곡한 작품으로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해 작곡한 대표작. 모든 바이올린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작품으로 제목은 집시를 뜻하는 독일어 치고이너(Zigeuner)와 선율이라는 뜻의 바이젠(Weisen)이 합쳐진 ‘집시의 노래’라는 뜻이다. 그가 헝가리를 여행했을 때 수집한 그 지방 집시들의 민요를 모티브로 작곡한 작품으로,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할 수 있는 모든 테크닉이 총망라돼 있어 사라사테 외엔 누구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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