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돈재 前 국정원 1차장, 前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의 일이다. 김영삼 정부는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의 국내정치 개입을 금지하는 대신 안기부가 산업정보 활동을 적극 추진토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언론도 무한경쟁의 시대에 대응한 올바른 업무 방향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났다. 세계 언론들이 한국이 산업스파이 활동을 본격화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국정원에 산업스파이 활동을 시키겠다고 공식 천명한 것이니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그 후 우리나라는 중국·러시아·이스라엘 등과 함께 세계 10대 산업스파이 위험 국가로 지목돼 엄청난 감시를 받게 됐다.

정보기관이 새로운 업무를 추진할 때는 세 가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첫째, 반드시 국가가 담당해야 할 업무인지 여부다. 둘째, 꼭 비밀활동, 비합법 활동이 주(主)임무인 정보기관이 담당해야 할 업무인지 여부다. 셋째, 정보기관 업무 가운데 우선순위가 높은 업무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김영삼 정부가 그런 기초적인 원칙도 무시한 채 정보기관 개혁을 추진하다가 산업스파이 위험 국가라는 오명만 얻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김영삼 정부의 데자뷔다. 지난 4일 국정원을 방문한 문 대통령은, 국정원이 우주정보 등 현대 과학기술을 접목한 미래형 정보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면서 우주 공간에서의 정보활동은 국정원만이 할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이니 마음껏 역량을 발휘해 달라고 했다. 우주정보는, 위성 등 우주 자산(資産)에 관한 정보, 우주에서의 위해(危害) 요인에 관한 정보, 위성을 통해 수집한 정보라는데, 국정원이 우주안보를 위한 기술 연구개발(R&D)에도 주력하겠단다.

박지원 원장은 향후 국정원 정보활동은 사이버가 핵심이고 예산의 절반을 국가 사이버 안전에 투입하겠다고 언급했다. 또, 국정원은 코로나19 백신 확보 지원, 각국 발병 성향과 대응 동향을 모니터링했다고 발표했다. 최근 북한의 한국원자력연구원과 대우조선해양 해킹, 이스라엘 모사드가 코로나 백신 확보에 기여했다는 보도 등을 고려하면 전혀 잘못된 것이라고 탓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북핵으로 국가안보가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이때, 국정원이 사이버 안전과 우주정보에 주력하겠다니 납득하기 어렵다. 시중에는 현재 국정원이 추진 중인 대북 공작은 북핵 대응이나 북한 개방이 아니고 남북관계 복원이라는 얘기가 파다하다. 이건 통일부의 일이다. 박 원장은 이제 국정원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간첩 검거 실적을 보면 더욱 그렇다. 노무현 정부 19명, 이명박 정부 23명, 박근혜 정부 9명인데, 문 정부는 2건에 불과하다. 그것도 박 정부 때 적발한 것이다. 북한이 진정성 있게 대화에 나오도록 하려면 튼튼한 안보태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박 원장의 관심은, 완벽히 준비해 대공수사권 이관을 ‘되돌릴 수 없도록 하는 일’이란다.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다. 우선 자기 발밑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국정원이 원훈(院訓) 교체나 우주정보 수집보다 북한과 종북 세력의 동향 파악과 견제에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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