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임(1924∼2020)

많은 사람에게 그렇듯 할머니라는 존재는 내게도 애틋하다. 할머니는 내 33년 인생에서 하늘나라로 가시던 지난해 여름까지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할머니이자, 엄마이자, 숙제와 같은 존재로 항상 같은 자리에 있어 줬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할머니는 맞벌이 부부였던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반겨 줬고, 모든 끼니와 간식을 내 입맛에 맞춰 만들어 줬다. 더운 여름이면 내가 잠들 때까지 머리맡에서 부채질해 줬고, 엄마가 사주지 않는 장난감을 사 줬으며, 부모님께 혼날 일이라도 있으면 본인 뒤에 꼭꼭 숨겨 줬다.

대학생이 되던 무렵 할머니에게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찾아왔다. 무지하게도 나와 우리 가족은 할머니에게 찾아온 변화를 빨리 알아채지 못했고, 할머니가 같은 질문을 반복하거나 가스불을 켜 놓은 채 깜빡할 때면 화부터 냈다. 사실 할머니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자주 할머니에게 화를 냈고, 짜증을 냈다. 할머니를 혼자 두기 불안했던 엄마는 내가 최대한 할머니와 오랜 시간 함께 있어 주기를 바랐고, 20대가 돼 자유롭게 밖으로 나돌고 싶었던 내게 할머니의 존재는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휴가차 떠난 해외 여행지에서 할머니와 함께 온 손녀의 모습을 보거나, 할머니와 무언가를 함께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면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길에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들을 볼 때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거동하지 못하게 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됐을 때도 할머니가 언제까지고 나와 함께일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할머니의 밥을 챙겨드리는 일을 귀찮아하고, 대소변 돕는 일을 숙제처럼 생각했다. 할머니와 할머니를 돌보는 엄마 때문에 자유롭게 주말을 보내지 못하고, 마음껏 놀러 다닐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런 철없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연신 얼굴을 쓰다듬고 입 맞추며 “예쁘다” “사랑한다”고 말해 줬다.

지난해 6월 할머니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나던 날 장례지도사는 청각이 가장 마지막까지 기능한다며 할머니의 귀에 대고 인사를 건네라고 했다. 눈을 감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내가 건넬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와 “고맙다”뿐이었다. 분명 나도 할머니의 인생에서 그녀에게 행복이고 자랑인 순간이 있었을 것이며, 할머니를 위해 보낸 수많은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32년간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줬던 할머니에게 그 흔한 “고맙다”는 말도 한 적 없는 내 모습만 떠올라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만 거듭했다. 기억을 잃고서도 나를 사랑해주던 할머니였다. 어느덧 할머니가 떠난 지 1년, 이제는 할머니에게 “정말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그립다”고 말하고 싶다.

손녀딸 A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립습니다·자랑합니다·미안합니다’ 사연 이렇게 보내주세요

△ 이메일 : phs2000@munhwa.com△ 카카오톡 : 채팅창에서 ‘돋보기’ 클릭 후 ‘문화일보’를 검색. 이후 ‘채팅하기’를 눌러 사연 전송△ QR코드 : 독자면 QR코드를 찍으면 문화일보 카카오톡 창으로 자동 연결△ 전화 : 02-3701-5261

▨ 사연 채택 시 사은품 드립니다.

채택된 사연에 대해서는 소정(원고지 1장당 5000원 상당)의 사은품(스타벅스 기프티콘)을 휴대전화로 전송해 드립니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