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더블린의 카페에서, 종이에 혼합재료, 44x33cm, 2021.
김병종, 더블린의 카페에서, 종이에 혼합재료, 44x33cm, 2021.


■ (80)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와 ‘더블린 사람들’

뛰어난 이야기꾼 제임스 조이스
거리에서 마주칠 법한 인물들로
몽타주 그리듯 세밀하게 삶 묘사

세상 걱정 없을 것 같은 도시 속
우울과 한숨 그리고 절망과 야만
살아 움직이는 볼록판화 같아


세기의 대작 ‘율리시스’를 쓰기 전 제임스 조이스는 준비운동하듯 ‘더블린 사람들’이라고 이름 붙인 단편모음집을 펴낸다. 그는 훗날 조국 아일랜드 사람들이 소설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그 책을 묶었노라고 술회한 바 있다. 소설은 허구다. 그런데 그 허상의 거울에 실제의 삶을 비춰본다고? 어폐가 있어 보인다. 예컨대 허구가 실재를 견인한다는 것인데 그러려면 허구가 엄청 힘이 세거나 허구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최소화돼야 한다. 소설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물론이다. 그 점에서 특이하다.

조이스라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문장조련사는 잠깐 물러나 있는 형국으로 허구 속의 인물 군상들이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 소설이 현실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허세를 부리는 소년과 늘 현실 너머의 몽롱한 꿈에만 사로잡혀 사는 노처녀와, 허구한 날 술에 찌들어 살면서도 집에만 들어오면 큰소리를 쾅쾅 쳐대는 사내들의 이야기가 일종의 연극 시퀀스처럼 연결된다. ‘하숙집’ ‘두 청년’ ‘뜻밖의 만남’ ‘진흙’ ‘가슴 아픈 사연’ ‘은총’ ‘죽음’ … 등등의 제목을 달고.

그 이야기와 사연들을 퍼즐처럼 꿰맞추면 비로소 하나의 초상이 드러나는데 좋든 싫든 그 몽타주 같은 초상을 통해 작가는 아일랜드, 좁게는 ‘더블린 사람들’의 민낯을 찾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소설이 발표되기 전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갈등은 거의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잉글랜드와 어떻게 다른가”라고 묻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소설 속의 더블린 사람들을 현실 공간 속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템플바 거리의 풍경   자료사진
템플바 거리의 풍경 자료사진

나는 더블린 여행의 버킷리스트 중에 흔히 꼽을만한 ‘작가 박물관’이나 ‘제임스 조이스 문학관’ 혹은 오스카 와일드의 동상이 부도덕한 자세로 누워 있는 ‘메리언 스퀘어 공원’, 그리고 영화 ‘스타워즈’ 연작 중 한 모티브가 됐을 만큼 초현실적이며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보이는 저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의 ‘롱 룸’, 그리고 ‘아일랜드의 구겐하임’이라고 일컬어지는 ‘휴 레인(1875~1915) 미술관’을 뒤로하고 보다 밀집한 “사람들의 거리” 쪽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햇빛 쏟아지는 찬란한 문화유산의 장소가 아닌 시끌벅적하고 음식 냄새나며 때로는 소설 속에서처럼 낮술에 취해 불그레해진 얼굴로 다툼질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한 그런 곳을 찾아 나선다.

우선 더블린의 명동이랄 수 있는 그래프턴 거리로, 그다음은 템플바 쪽이다. 영화 ‘원스’를 촬영했대서 관광 명소가 된 그래프턴 거리는 하지만 소박하기 그지없다. 전통 아일리시 펍과 자갈길의 ‘템플바’ 구역 역시 비좁고 한산하기는 마찬가지. 사실 서울처럼 붐비고 다이내믹한 도시를 벗어나면 웬만한 나라의 도시들은 아무리 번화가라 해도 한적하게 느껴질 정도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지역은 살짝 소설 ‘더블린 사람들’에 근접해 있는 느낌이 든다. 거대한 서고와 같은 이 책들의 도시에서 이 거리만은 사람 사는 더블린이라는 정겨운 냄새가 풍겨온다.

그런데 이 도시, 이 불가사의한 도시의 여러 매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두운 구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최근 소설 아닌 영화 ‘아이리시맨’을 보고 보다 직접적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뒤져보니 뜻밖에도 문학의 나라는 다른 오명도 지니고 있었다. 아일랜드 마피아는 그 뿌리가 깊었고 악명이 자자했던 것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치고 어디엔들 어둠 없이 빛만 쏟아지는 곳이 존재하랴만. 문학과 폭력은 아무래도 잘 줄긋기가 되지 않는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고 바로 그러한 이질성과 낯선 문화들의 공존이야말로 살아 있는 문학의 재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실 허구란 어느 면에서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비춰내는 일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햇빛 환하고 흰 구름 둥둥 떠가며 세상 걱정 없을 듯한 이 도시에도 어김없이 우울과 한숨, 절망, 야만의 밤이 있을 것이고 말고다. 작가는 노련한 내과의처럼 이 도시의 그 습기 차고 어두운 쪽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은 더블린만의 ‘율리시스’이자 ‘보학(譜學)’이며 허구의 소설이다. 동시에 사람들의 삶이 살아 움직이는 일종의 볼록판화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허다한 문학 박물관의 진열장 속에 화석돼 누워 있는 문자들과는 달리 소설 ‘더블린 사람들’은 어물전의 갓 잡아 올린 생선들처럼 그 문장이 퍼덕이며 살아 움직인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찍혀 나오는 그 볼록판화를 확대하면 거기 더블린 사람들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더블린 사람들’과 ‘율리시스’

르포 기사 같은 15가지 단편… 대작 ‘율리시스’와 일맥상통


창작집 ‘더블린 사람들’에는 모두 15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제임스 조이스(1882~1941)는 마치 르포 기사처럼 주관적 시각을 최소화하면서 더블린의 중하류 계층 인물들을 그려낸다. 그 다면적인 캐릭터들은 정밀 묘사하듯 세밀하게 이어지는데 더블린 시내의 구체적 지리까지 함께 명시하고 있다. 이런 서술방식은 그가 수필가이며 희곡 작가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이 소설집이 발표된 지(1914) 8년 후에 나온 대작 ‘율리시스’ 역시 이른바 ‘블룸즈 데이’의 하루 동안에 일어난 더블린 출신 세 사람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블린 사람들’과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전작에 나온 인물이 율리시스에 그대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일랜드가 배출한 기라성 같은 작가 중에서도 유독 조이스와 그의 작품들이 아일랜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문학성뿐 아니라 이처럼 더블린을 소설 속에 생생한 무대로 설정하고 그 도시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그의 문학적 뿌리를 아일랜드와 더블린에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이름은 아일랜드인의 자존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1917년 이후 무려 아홉 차례나 눈 수술을 받은 이후 평생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채 집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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