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이던 2006년 11월. 대연정 제안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으로 지지층이 떨어져 나가고, 신당 창당 움직임으로 당·청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윤태영 대변인을 불러 친필 메모를 건넸다. “문장 하나, 낱말 하나도 절대로 바꾸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메모에는 ‘나는 신당을 반대한다. 신당은 지역당을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을 지킬 것이다. 당적을 유지하는 것이 당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고 적혀 있었다.
평소 속에 있는 얘기를 가감 없이 했던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말 당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4년 중임제’ 원포인트 개헌론 등 다양한 정국 돌파 해법을 제시했지만 번번이 당과 마찰을 빚었고, 지지율은 10%대까지 떨어졌다. 결국 정권을 야당에 내주고 퇴임 후 불행한 사태를 맞았다.
비서실장으로 이런 장면을 생생히 목격한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5년 차인데도 40%대의 국정 지지율을 유지하는 의외의 비결은 ‘침묵’이다. 부동산을 비롯한 경제 실패에 남북관계 파탄, 그리고 최근엔 자랑하던 ‘K-방역’까지 4차 대유행으로 실패하고 있는데도 지지율의 변화는 크지 않다. 여당 대선 경선 주자들도 대통령의 지지율이 30% 이하로 떨어졌으면 각을 세웠을 것인데 대통령을 건드리지 않는 것은 지지율을 의식해서다.
문 대통령의 원래 스타일이 자신의 주장을 말하지 않는데 특히, 자신에게 불리한 사안은 한 달이건 두 달이건 말을 하지 않는다.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밝혀야 할 조국 전 법무장관 비리 의혹에 대해선 온 나라가 떠들썩했지만 문 대통령은 한 달 넘게 침묵하다 신년기자회견 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문 대통령을 오래 접하지 않은 사람은 대통령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면 ‘동의한다’로 오인할 가능성이 크다. 여당의 한 인사는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줄 알았더니 나중에 비서진이 아니라고 해 놀랐다”고 말했다. 이낙연 전 총리의 전직 대통령 사면 발언도 문 대통령의 사인을 잘못 해석해 벌어진 일이라는 관측도 있다. 침묵은 시빗거리를 없앨 수는 있지만, 국정 책임자에게는 무책임·무능의 상징일 수 있다.
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