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문화부장

코로나19, 폭염과 열대야로 괴로운 요즘 ‘미디엄 템포’가 우리를 위로한다. 미디엄 템포는 말 그대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를 뜻하지만, 흔히 음악의 한 장르로 통한다. 중간 빠르기, 애절한 가사, 차근차근 절정으로 나아가는 구조가 특징이다. 코로나19 확진자가 1600명대로 치솟는 위급한 시대에 무슨 음악이냐 싶지만, 큰 흐름이 속수무책일수록 작은 것에서 위로를 찾게 된다. 미디엄 템포는 2000년대 초 SG워너비, 브라운아이드소울 등 R&B·발라드 등을 내세운 그룹들이 활동하며 전성기를 누리다 아이돌 시장에 밀려 사라진 장르다. 그런데 그 미디엄 템포가 돌아왔다. 대표 주자는 ‘세월을 걷다 보면 지칠 때도 있지만/그대에게 쉴 곳이 되리라’고 노래하는 그룹 SG워너비다. 이들은 얼마 전 음원차트 1위까지 오르며 차트 역주행을 이뤄냈다.

모두에게 잊힌 노래를 다시 불러낸 것은 MBC 예능 ‘놀면 뭐하니?’다. 여기서 방송인 유재석은 음악 제작자 ‘유야호’라는 ‘부캐(부캐릭터)’로 나와 SG워너비를 모델로 한 새 남성 보컬그룹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이 성공의 여러 요인 중 하나가 유재석의 ‘부캐’ 놀이에 시청자들이 흔쾌히 동참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부캐 전성시대다. ‘본캐릭터가 아니라 새로 만든 캐릭터’인 ‘부캐’는 원래 게임에서 사용되다 최근 대중문화 분야에서 ‘평소 자신과 다른 모습의 캐릭터’로 확대되면서 대유행 트렌드가 됐다. 2020년 유재석이 ‘놀면 뭐하니?’에서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나오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 숱한 부캐 스타들이 나왔다. 게다가 3차원 가상세계 메타버스가 열풍을 일으키면서 일반인들도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여러 캐릭터로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다. 가치가 다양해지고, 감각은 예민해지고,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지향점을 갖는 시대에 부캐는 현대의 삶의 방식이자 스타일이 됐다. 뚜렷한 한 가지 정체성으로만 살기엔 세상이 너무 폭발적으로 다분화됐기 때문이다. SNS나 인터넷에서 이미 실제와 다른 부캐로 살아간 지도 오래된 일이다.

실제로 캐나다 출신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자아연출의 사회학’에서 “우리의 일상적 삶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자아를 연출하는 공연”이라며 한결같이 참된 자아란 허상에 불과하고 ‘지금 여기’ 상황에 따라 여러 상황적 자아가 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누구나 부모로, 고객으로, 친구로, 직장인으로 모두 다른 자아를 살아간다면서 이 연출된 자아의 결정적 핵심은 신뢰라고 말한다. 상대와의 소통 속에서 연출된 또 다른 자아가 신뢰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부캐가 ‘부캐 예능’의 동의어로 모두가 얼마나 재미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군가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고 했지만, 최근에 그저 웃기려 했던 정치권의 부캐 놀이가 젊은이들로부터 싸늘한 반응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 재미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정치인부터 기업과 신상품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앞다퉈 신세대를 겨냥해 매우 손쉬운 이미지 변신으로 사용되는 ‘부캐’. 하지만 결국 문제는 신뢰다.
최현미

최현미 논설위원

문화일보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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