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논설위원

상대방 인정이 열린사회 기본
이재명의 위험한 ‘날치기 소신’
토론 없는 다수결은 제도 폭력

5·18 독점 깨지자 당황한 與
언론·검찰 장악 행태 노골화
닫힌사회 북한 중국엔 저자세


영국의 철학자 카를 포퍼는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을 썼다. 그가 정의하는 ‘열린사회’는 이성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는 주장이 통용될 수 있는 곳이다. 진리가 독점되지 않으면서 절대적 진리가 없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그런 사회다. 반면 ‘닫힌사회’는 전체주의에 기초한 사회로, 전체가 개인을 규제하며 선민사상 등에 의해 지배되는 곳을 말한다. 한마디로 열린사회의 반대 개념이다.

포퍼의 분석 틀에 기초해서 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과연 열린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대선을 8개월 앞두고 집권 여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선에 나선 후보들의 언행을 보면 열린사회로 가는 길은 한참 멀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아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형해화하려는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짓밟아 없애버려야 하는 ‘독극물’로 여긴다.

여권 대선 후보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재명 경기지사는 지난 15일 김어준 씨가 진행하는 TBS 라디오 방송에 출연, 국회가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재난지원금을 “과감하게 날치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 지사는 “180석 얘기를 자주 하지 않냐”면서 “정말로 필요한 민생에 관한 것은 과감하게 날치기해줘야 한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던 1996년 12월 26일 여당인 신한국당은 야당 의원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새벽에 단체로 버스를 타고 몰래 여의도를 건너 들어가 자기들끼리 국회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이들은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을 날치기해 통과시켰다. 이후 야당과 노동계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40일간 벌어진 가두 집회에는 연인원 350만 명이 참가했다. 1월 21일, 결국 YS는 야당 총재인 DJ(김대중), JP(김종필)와 함께 영수회담을 가진 후 이 자리에서 노동법 재논의를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입만 열면 민주화 적통(嫡統)이라고 자부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입에서 ‘날치기’라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다. 소신이라고 한다. 자신들만 옳고 야당은 반(反)민생으로 여기는 독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다수결의 힘을 이용해 충분한 토론과 타협 없이 자신들 뜻대로 관철시키는 것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제도적 폭력이다. 임대차 3법을 비롯해 문재인 정권에서는 이런 폭력이 이제 일상이 돼 버렸다. 그 결과 전셋값이 7배나 오르며 고스란히 서민의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날치기로 통과시켜 만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잘 돌아가고 있는가. 이래놓고선 후보들끼리 서로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의 적통이라고 주장하며 왕조시대 ‘세자 놀이’에 빠져 있다.

김두관 의원은 지난 19일 국립 5·18 묘지를 참배한 뒤 앞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참배하면서 손으로 만졌던 열사 묘역의 묘비를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김 의원은 “윤 전 총장이 더럽힌 비석을 닦아 드려야겠다는 심정으로 손수건으로 비석을 닦았다”고 했다. 자신들이 ‘볼모’로 잡은 5·18에 대해 이제 야당도 참배하는 상황에 이르자 빼앗기지 않겠다는 독선의 극치다. 독점이 깨지는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영령들이 잠든 묘지까지 조폭들이 영역 다툼하는 곳처럼 만든 행태가 역겨울 따름이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의 필 로버트슨 아시아 부국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대북전단 금지법과 관련, “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 학생운동을 할 때 정부가 민주주의 가치를 담은 전단 배포를 금지했다면 가만히 있었을까”라고 되물었다. “아마도 졸도할 정도로 화를 냈을 것”이라고 했다. 이제 여권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입법화해 정부 비판의 입을 틀어막겠다고 한다. 법무부 장관이 노골적으로 수사에 개입하고, 검찰과 경찰의 수사는 친정권이냐 아니냐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외교에서도 닫힌사회인 중국과 북한의 내정간섭적 행태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면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에 대해선 정반대다. 학자들은 ‘역사는 진보한다’고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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