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은 녹색, 한쪽은 보라색으로 물들인 짧은 머리와 총천연색으로 빛나며 햇빛을 무지갯빛으로 반사하는 선글라스, 그리고 DC코믹스의 ‘조커’ 또는 마블 유니버스의 ‘헐크’를 연상케 하는 마스크.
1일(현지시간) 2020 도쿄올림픽 육상 여자 투포환 결선에서 2위를 기록해 은메달을 거머쥔 미국 국가대표 레이븐 손더스(25·사진)의 ‘액세서리’들이 그야말로 “센세이션(돌풍)을 일으켰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마지막 포환을 던진 후 여유로운 표정으로 경기장을 거닐던 그는 성조기를 휘두른 채 카메라를 향해 여러 포즈를 취하고, 심지어 ‘트월킹(엉덩이춤)’까지 선보였다. 그러나 정작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던 시상대 위에선 손더스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단호한 얼굴로 정면을 쏘아보던 그녀는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X자를 그렸다.
이 동작을 취한 의미를 묻자 손더스는 “탄압받는 모든 사람이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나는 수많은 집단의 일부”라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투쟁하고 있는, 그러나 자신을 대변해 줄 기반이 없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목표다.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그리고 사과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흑인인 손더스는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180명의 성 소수자 중 1명이다. 한때 우울증을 앓았던 그녀는 2018년 1월 인스타그램에 “내 삶을 끝내려는 시도를 실행하는 중”이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손더스는 AP통신에 “그때 내 오랜 치료사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면, 난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며 “22년 동안 나를 짓눌렀던 모든 것을 마침내 처리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나는 나 자신과 헐크를 분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손더스는 자신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힘겨운 길을 걸어온 헐크를 자신의 또 다른 자아로 묘사해 왔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 무대에서 선수들에게 기자회견 도중의 ‘의견 표명’ 정도는 가능하도록 규정을 완화했지만, 단상 위에 올라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손더스 역시 이번 행위로 징계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손더스는 “우리 세대는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강해지는 것도 좋지만, 100% 항상 강하지 않아도 괜찮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돼도 괜찮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했던 미국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 일본 테니스 선수 오사카 나오미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손더스는 도쿄올림픽 선발전 시상식장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며 논란을 일으켰던 미국의 흑인 해머던지기 국가대표 그웬 베리와도 절친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