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타지아’展 여는 정우범 작가
갤러리 들어서면 온통 야생화
먹 활용 한국 고유의 美 살려
좋아하는 동요 써넣은 작품도
“어릴적부터 먹 갖고 놀았더니
물과 친해지며 수채화에 끌려
사물·풍경에 제 심상 담았죠”
글·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
만나기로 한 작가가 늦게 나타나길 바랐다. 꽃밭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혼자 더 빠져 있고 싶어서였다. 갤러리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온통 꽃의 황홀경이었다. “제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보는 분들이 미적 행복감을 한껏 누리셨으면 하는 것이지요. 코로나19로 답답한 시기에 야생화 꽃밭의 자연 판타지로 위로받으셨으면 합니다.”
지난 23일 만난 정우범(75) 작가는 질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개인전 ‘판타지아-Fantasia’를 연다. 꽃밭을 소재로 한 수채화 연작 27점을 선보인다. 이날은 전시 개막 하루 전이었으나, 소문을 들은 수집가들이 이미 찾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수채화의 새 경지를 독보적으로 연 작가로 평가받는다. ‘한국 수채화는 정우범 전과 후로 나뉜다’(이재언 미술평론가)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는 수채화에서 다루지 않은 소재들을 화폭에 과감히 끌어들였다. 겨울 목화밭, 성벽, 돌탑, 석불, 늪 등. 이런 것들을 다룬 그림은 얼핏 보기엔 유화처럼 중량감이 있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흐르고 번지는 수채화 특유의 물맛이 뚜렷하다.
정 작가는 2018년에도 꽃그림 연작으로 ‘판타지아’ 전을 연 바 있다. 그때와는 어떻게 다를까.
“이전 작품들은 화면 전체를 꽃으로만 채웠는데, 이번엔 흑(黑)과 백(白)의 배경 여백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동요 등을 글자로 써넣은 문자 공간도 새로 등장합니다.”
먹을 써서 흑색을 화면에 들이고 번짐 효과를 주면서 백색과의 균형을 꾀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흑과 백이 꽃밭의 적(赤), 청(靑), 황(黃)과 어울리면서 한국 고유의 오방색 느낌이 나도록 의도했다는 것이다.
서양화 장르에 동양화의 먹을 활용한 것은, 그의 유년 시절 기억과 관련이 있다. “선친이 서당 훈장을 하신 덕분에 제가 먹을 갖고 놀았거든요. 그렇게 물과 친하다 보니, 나중에 기름 물감을 쓰는 유화가 아닌 수채화를 택하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정 작가의 표정이 너무 진중해서 부러 어깃장을 놨다. “수채화는 색상, 표현법, 스케일 등의 문제로 거장이 잘 나오지 않는 장르가 아닌가요.”
“미국에서 국민화가로 추앙받는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가 수채 화가입니다. 수채화 맛을 내면서도 깊이 있는 작품을 남겼지요. 저는 와이어스를 롤 모델로 삼되, 사물과 풍경의 구상적 모사에 그치지 않고 저의 심상을 담은 반(半)추상을 지향해왔습니다. 그림은 사진과 달라야 하니까요.”
조용한 말투엔 어느 누구와도 비견되고 싶지 않다는 자부가 배어 있었다. 수제 종이 ‘아르슈’에 아크릴 안료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거나 액자 옆면까지 화폭으로 쓰는 그의 개성은 그런 자부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20호짜리 소품도 있지만, 100호가 넘는 대형작품도 꽤 있다. 캔버스를 세워서 그리는 수채화 특성상 대작을 만들기 어려운데,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제가 특수한 작업대를 고안했어요. 그 위에 패널을 올려놔 물감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고, 4면을 돌아가며 작업하지요.”
그는 국내보다 미국과 유럽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다. 1990년대에 워싱턴, 뉴욕, 파리에서 초대전을 한 후에 국내에서 주목받았다. 한국화랑협회장을 지낸 김창실(1935∼2011) 선화랑 창립자가 그의 그림에 반해 1997년 개인전을 주최했고, 작품이 완판되고 팸플릿까지 품절되는 흥행 대박을 기록했다.
현재 선화랑을 운영하는 원혜경 대표는 당시 팸플릿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그림들은 과연 수채화인가 싶게 소재가 다양합니다. 색채는 깊고 어둡지요. 저도 크게 매료됐는데, 정 작가가 2000년 이전 작품들을 비매품으로 지정한 이후 이젠 소장하기가 어려워요. 꽃그림을 흔하게 여길 수 있으나, 정 작가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실제로 정 작가는 자신만의 개성을 구현하기 위해 꾸준히 실험적 시도를 해 왔다. 70대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판타지아 연작은 모두 꽃밭을 그렸으나, 작품마다 형태와 색감 등에서 차별성을 뒀다”고 했다. 24일 개막한 전시는 오는 9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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