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이 났다. 일부 여당 의원이 외신기자간담회에서 했다는 발언을 접했을 때였다. 이들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필요성을 강변하며 “한국 언론이 국민 신뢰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외신 기자들 앞에서 우리 언론을 깎아내리며 저들은 정권의 홍위병 역할을 해냈다고 자부했을 것이다. 이들은 이날 법안 대상에 외신이 포함되는지에 대해 정부와 이견을 보이며 갈팡질팡함으로써 외국 기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세계 언론계가 가짜뉴스 제재를 빌미로 언론을 징벌하는 법을 강행하는 한국 집권당을 주시했다. 세계신문협회는 “비판 언론을 침묵시키고 민주주의 전통을 훼손할 수 있다”는 성명을 냈다. 아시아기자협회도 “아시아의 자랑이었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짓밟는 시대착오적 처사가 벌어진 것에 우려를 표한다”고 했다.
시대착오라는 말이 뼈아프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법 제정 시도는 박정희 정권 때도 있었다. 1964년 신문윤리위원회법을 만들어 언론인 처벌 등을 추진했다가 반발에 부딪치자 유보했다. 당시 언론은 스스로 한국신문윤리위원회를 만들어 외부 규제에 맞섰다. 박 정권 이후의 정권들도 예외 없이 언론을 통제하려 들었다. 노무현 정권이 특히 강경했으나 언론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문재인 정권은 의회 권력을 통해 언론징벌법을 다시 추진했다. 개혁을 내세웠으나, 현 정권의 실정(失政)을 보도해 온 언론들을 욕보이겠다는 당파적 옥셈일 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야 살아남는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선법은 놔둔 채 비판 언론을 협박하는 징벌법을 추진한 것이 그 증거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뉴스들을 가짜 사례로 초드는 여권 강경파의 발언들 속엔 문 대통령 퇴임 후를 지키겠다는 꼼수가 숨어 있다.
정치 리더십을 다룬 미국 드라마 ‘지정생존자’에서 극 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언론에 대한 어떤 강압도 허용해선 안 된다. 자유국가니까.” 도널드 트럼프가 현실 정치에서 일부 언론에 불만을 드러냈으나, 자유국가 원칙을 무너뜨리진 못했다.
한국의 좌파 정권은 그걸 깨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국내외 언론계뿐만 아니라 친여 재야 인사들조차 법안 강행에 반대하자, 여당은 야당과의 협상에 나서 대화를 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언론을 징벌하겠다는 아집은 고수했다.
언론의 자유와 더불어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언론은 보도 윤리를 높이는 방안을 끊임없이 찾아서 실천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 시민사회가 도태시켜야 한다. 어려운 과제이지만, 그 방안을 충분히 토론하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민주주의 모습이다. 입법독재로 언론을 징벌함으로써 강성 지지층의 정파적 복수심을 충족시키겠다는 발상은 야만적이다.
십수 년 전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언론인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북측 기자들이 ‘수령님 교시’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것을 보며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 산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언론징벌법안이 그 자랑을 짓이겼다. 부끄럽다. 세계 언론이 한국 민주주의 퇴행을 걱정하는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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