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우 논설고문

성장분야로의 노동 이동 정책
싱가포르 ‘경제 전략’의 핵심
선진국들 생애기능 보장 주목

WEF, 노동자 재교육 성공은
세계 GDP 6.5조 달러 값어치
한국 여전히 현금뿌리기 집착


얼마 전까지 싱가포르는 한국·대만·홍콩과 함께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지금 한국과 싱가포르는 천양지차다.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이 무려 6만4000달러로 한국의 2배나 된다.

무엇이 둘 사이를 이토록 큰 차이로 갈라놓았을까. 싱가포르는 인구가 600만 명에 불과해, 산업 발전에 그다지 좋은 조건을 갖추지 못한 나라다. 늘 노동력 부족을 겪어야 했던 싱가포르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를 적극 수용해 왔다. 하지만 값싼 노동력 수입은 싱가포르 국민의 임금 수준을 억제하거나 실업을 야기하는 부작용이 있어 국민 불만은 쌓여갔다. 그래서 싱가포르 지도자들이 내놓은 대안이 ‘재교육 시스템’ 구축이었다. 국민 모두를 신기술로 무장시켜 1인당 생산성을 끌어 올리자는 것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약 2만5000개의 직업훈련 코스를 마련하고 25세 이상 희망자에게 500싱가포르달러(약 40만 원)의 훈련비를 지급했다. 2020년부터는 69세까지 대상을 확대하고 훈련비도 증액했다. 노동자들의 생애 교육을 정부가 책임지는 셈이다.

주요 선진국이 싱가포르의 경험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팬데믹 이후 ‘현재의 일자리 유지’로부터 ‘성장 분야로의 노동 이동’ 쪽으로 정책 중심을 옮기기 시작한 나라들은 대단히 매력적인 정책으로 평가한다. 여기에는 선진국들이 직면한 ‘기술적 실업’이라는 위협도 적지 않게 작용한다. 자동화와 인공지능(AI) 등의 보급으로 인간 노동의 대부분이 기계로 대체되고 있으나, 데이터 분석이나 사이버 보안 등 새로운 업무 분야는 노동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25년까지 디지털화로 일반 사무직 등 8500만 명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데 반해 AI 전문가 등 9700만 명분의 새로운 고용이 창출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얼마나 많은 국민이 새로운 직종으로 전환하느냐에 국가 도약 여부가 달려 있다는 의미다.

노동자 재교육(Reskilling)은 그들의 자신감 회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업이 고용을 꺼리는 데는 경직적 노동시장 등 여러 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고용하고 싶은 노동자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도 작용한다. 신기술 재교육은 구직자와 구인자를 원만하게 연결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이것이 결국 국가 전체의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된다. WEF에 따르면 재교육의 성공은 전 세계 노동자의 생산성 개선을 통해 세계의 국내총생산(GDP)을 2030년까지 6조5000억 달러(약 7000조 원)나 증가시킬 수 있다.

지난 4월 한국 정부가 한창 K-방역이나 자랑하고 있던 시점에 영국은 포스트 코로나 경제정책의 핵심을 재교육에 두겠다고 발표했다. ‘라이프타임 스킬즈 개런티(Lifetime skills guarantee·생애기능보장)’ 정책이다. 일반 성인이 프로그래머나 엔지니어 등의 직종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수강료 전액 무료인 전문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관련 사업에 25억 파운드(약 4조 원)를 투입한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팬데믹 이후 경제부흥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3월 발표한 ‘미국 고용계획’은 제조업이나 환경 분야 등 성장 산업의 노동력 개발에 1000억 달러를 투입하는 방안을 담았다.

한국도 고용 관련 예산은 만만치 않다. 올해 2월 고용노동부가 밝힌 액수는 35조6487억 원에 이른다. 거기에 무려 2차에 걸친 추경까지 더하면 거의 50조 원에 이른다. 문제는 이런 천문학적 예산이 엉뚱한 데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휴지 줍기, 새똥 닦기, 교통안전 지킴이 등 노인 알바가 대부분이다. 청년에게도 빈 강의실 불 끄기, 라돈 침대 조사 등 정체를 알 수 없는 일자리가 제공된다. 정부가 고용을 경제 성장 측면에서가 아니라 현금 뿌리기의 포퓰리즘이나 취업자 통계수치 조작 측면에서만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예산 규모라면 한국 국민에게 세계 제1의 재교육 기회를 부여할 수 있으며, 성장전략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정부가 진정 경제성장에 관심이 있다면 고용 정책의 패러다임을 전면 수정해야 마땅하다. “고용률은 2005년 이후 가장 높으며, 고용률 상승폭은 2000년 3월 이후 최고”(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라며 엉뚱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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