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포커스 - 독일 총선 D-10

7월 홍수에 180여명 사망하자
기민련 vs 녹색당 구도 무너져

부총리 겸 재무장관 맡은 숄츠
노련함·침착함으로 민심 얻어
메르켈 같은 이미지 구축 성공

최저임금 인상·부유세 등 주장
“10년간 잠들던 유럽 중도좌파
다시 깨우는 계기 될 것” 전망


16년의 재임 기간에 ‘유럽의 닻’ ‘서구 자유주의의 마지막 수호자’ ‘세계 정치의 마더 테레사’ 등 온갖 찬사를 받아 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꼽힌다. 유럽외교관계협회(ECFR)가 12개 유럽연합(EU) 회원국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EU의 수장으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보단 메르켈 총리가 적격이라고 답한 비율이 네덜란드 58%, 스페인 57%, 포르투갈 52% 등으로 나타났다.

중립적 입장에서 모든 이해 당사자를 참여시켜 끈기 있게 합의를 도출해 나가는 그의 ‘무티(Mutti·엄마)’ 리더십에 국제사회가 감응한 결과다.

독일인들 역시 메르켈 총리의 위기관리 능력에 굳건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모닝컨설트 조사에 따르면 그는 퇴임을 앞둔 시점에서도 1년 넘게 50%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해 왔다. 미국·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독일·캐나다·인도 등 주요국 정상 중 “가장 지지율이 높은” 지도자(유거브 조사·7월 9일∼8월 10일 시행)라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 같은 영광의 기록들을 뒤로하고 퇴임할 예정인,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진해서 총리직을 내려놓은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더했다.

이에 ‘포스트 메르켈’ 시대를 열 이번 총선도 결국 ‘메르켈과 누가 가장 닮았나’란 질문에 답하는 과정으로 요약되고 있다.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이번 선거는 메르켈 총리가 소속된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기민련)의 아르민 라셰트(60) 대표와 녹색당의 아날레나 베어보크(40) 대표의 양자 대결로 그려졌다. 그러나 투표일을 10일 남겨둔 현재 승기는 사회민주당(SPD) 후보인 올라프 숄츠(63) 부총리 겸 재무장관에게 쥐어져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언론들은 앞다퉈 그의 인터뷰를 싣고 있으며, 마크롱 대통령이 가장 먼저 엘리제궁으로 초대한 것도 숄츠였다.

◇‘메르켈 닮은꼴 찾기’ 승기는 “실수 없었던” 숄츠에게 = 기민련 지지율이 역사상 최저 수준인 21%(폴리티코 조사·13일 기준)까지 떨어진 가운데 사민당 지지율은 8월부터 급등하기 시작해 25%까지 올라선 상태다. 숄츠는 지난 12일 치러진 총리 후보 간 두 번째 TV 토론에서도 승자였다. 90분 동안 이어진 토론 직후 독일 국영방송 ARD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41%는 숄츠가 가장 설득력이 있었다고 답했다. 라셰트와 베어보크는 각각 27%, 25%를 득표했다.

대세가 숄츠에게로 기운 분위기를 의식한 듯 이날 라셰트는 베어보크를 거의 없는 사람 취급하며, 숄츠를 공격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숄츠는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 라셰트를 향해 강철 같은 표정을 유지하면서 사실을 왜곡하지 말라고 응수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몇 달 새 여론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난 배경에는 지난 7월 15일 독일 서부를 강타해 18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홍수가 있다. 홍수 발생 직후부터 기민련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라셰트가 피해 현장에서 활짝 웃는 모습이 대서특필됐고, 독일인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DPA통신은 “독일인들에게 메르켈 없는 기민련이 여전히 매력적인지 의문”이라며 ‘카리스마 없고 무색무취한’ 성향의 그가 경쟁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기민련이 “역사적 대실패에 직면했다”고 평했다.

기후 변화가 최대 의제로 떠오른 만큼 녹색당이 반사이익을 얻었을 법도 하지만 아니었다. ‘새로운 독일’을 내걸며 한때 돌풍을 일으켰던 베어보크는 표절 논란과 함께 지지율이 추락했다. 무엇보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이어 홍수까지 다중 위기에 놓인 독일인들은 개혁을 외치는 젊은 후보보다는 오랜 기간 연방 행정을 경험한, 노련하고 침착한 기성 정치인에게로 점차 눈을 돌렸다.

AFP통신은 “따분했지만 실수 없이 선거운동을 벌여 온 숄츠는 현 정부의 부총리이자 재정 관리인으로서, 메르켈의 유산을 계승할 수 있는 자연상속인으로 여겨졌다”고 분석했다. 전 정권과의 연속성, 그리고 전 정권만큼의 안정성을 내세운 숄츠가 인물 경쟁에서 승리한 셈이다. 독일의 저명 언론인 크리스티안 호프만은 뉴욕타임스(NYT)에 “변화와 친숙하지 않은 독일인들에겐 메르켈의 퇴장 자체가 이미 충분한 변화”라며 “그들은 가능한 한 현 정권을 수월하게 이어가겠다고 약속하는 후보를 신뢰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미덕으로 여겨지는 ‘기계적 안정성’…“유럽 좌경화 신호탄” 전망도 = 숄츠는 사민당 내부에서 보수파로 분류된다. 중도 보수 성향의 메르켈 내각 연정 체제에 두 번 합류해 장관직을 지냈다. 이 같은 이력은 이번 선거에서 메르켈과의 유사성을 어필하는 데 주요 자산이 됐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숄츠는 메르켈을 추어올렸고, TV 광고에 메르켈과 자신을 함께 등장시켰으며, 메르켈의 습관적 손동작인 마름모꼴 제스처를 따라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 모든 것이 “메르켈 집권 동안에는 기민련에 투표했지만, (상황에 따라) 사민당이나 녹색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겨냥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전했다. 메르켈 내각의 일원이었던 그는 라셰트나 베어보크보다 독일인들에게 한층 친숙한 얼굴이기도 했다.

위험 회피적 성향을 바탕으로 모든 변수를 통제하면서,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그에게 독일인들은 ‘기계’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FT는 이것이 “일부 국가에선 핸디캡으로 작용할지 몰라도 독일에선 미덕”이라고 했다. 숄츠는 재무장관으로서 독일이 종교시하는 균형 예산을 고수해왔지만, 팬데믹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서는 타격을 입은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4170억 달러(약 488조 원)에 달하는 ‘바주카포’(숄츠 자신의 표현)를 쏘는 면모도 보였다. 이 같은 대응은 피해 규모가 유사한 다른 유럽 국가들 대비 낮은 5% 미만의 경제 손실(2020년 기준·국제통화기금 추산)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ECFR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 유럽 국가는 독일의 리더십이 민주주의·인권(35%)이나 안보(27%)보단 경제·재정 문제(36%)에서 나온다고 여긴다.

숄츠는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최근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의 내용을 바탕으로 ‘존중’을 선거운동의 키워드로 삼았다. 성과주의를 배격하고 노동자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사상이다.

숄츠는 최저임금을 12유로(1만6000원) 수준으로 인상하고, 부유세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밖에 연간 40만 채의 주택 공급, 연금 지급 보장, 탄소 중립 경제 등을 공약했다. 그의 당선이 곧 독일의 좌경화를 의미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10년간 잠들어 있던 유럽 중도 좌파를 깨우는 계기”(가디언)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에서 빌 클린턴이, 독일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집권하던 2001년 이후 20년 만에 미·독 양국 지도자가 중도 좌파 성향 지도자로 채워진다는 상징성도 있다. 당선 후 숄츠는 녹색당, 극좌 성향의 디 링케 등과 연정을 꾸릴 가능성이 제기되는데, 협상 과정이 장기화할 경우 메르켈 총리의 재임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 지난 총선 때는 선거 이후 정부 구성까지 총 5개월 반이 걸렸었다.

장서우 기자 suwu@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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