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우 논설고문

나라 곳간 지킴이 역할 기재부
특정 권력 유지 수단으로 전락
홍 장관 재정운용 원칙 외면해

공기업 합해 정부 부채 1600兆
‘닥치고 기본소득’도 판칠 위기
홍남기 對 신재민 차이 더 뚜렷


조선 왕조의 건국 이념가인 정도전은 “한 국가가 통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년간 버틸 수 있는 3년지축(三年之蓄)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없다면 이미 나라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이 같은 국정 철학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창업의 기운은 사라져 갔다. 비축 곡식에 전혀 여유가 없었던 선조 때 임진왜란이 터지고 패망 직전까지 주저앉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3년지축은 조선의 호조, 즉 지금의 기획재정부에 맡겨진 임무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런 말을 남겼다. “국민이 누구를 믿어야 되느냐. 대통령, 여당 말도 못 믿는다. 그래도 어딘가 믿어야 할 곳이 한 군데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기획재정부여야 한다.” 그런데 기재부도 믿을 수 없다면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믿을 수 있나.

그가 봉직하는 문재인 정부는 유독 나라 곳간을 함부로 허문다는 평을 듣는다. 물론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자기네만큼 국민 복지에 정성을 쏟는 정권이 있는지 물을 수도 있다. 문 정부는 코로나 사태로 국민이 장기간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두 번이나 국가 재정에서 10여조 원씩 털어내 전 국민 위로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일반 국민이 아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이다. 이들은 정부의 방역대책에 따른 집합금지와 영업제한으로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다. 코로나 이후 자영업자 빚은 66조 원이나 늘었고 매장 폐업은 45만 개에 이른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들의 피해를 보상하겠다며 내놓은 올 3분기 예산 규모는 1조 원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그 속내를 살펴보기에 충분하다. 자영업자 수는 500만 명을 조금 넘지만 유권자로서의 국민은 4400만 명이라는 점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노골적이고 무차별적인 이런 유의 낚싯밥을 위해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거듭되면서 해마다 100조 원 안팎의 부채가 쌓여가고 있다.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내년 누적 정부 부채는 1000조 원을 훌쩍 넘는다. 40개 공공기관의 내년 부채가 585조 원이다. 공공기관 부채는 ‘숨겨진 정부 부채’이니 이를 합하면 1600조 원에 달한다. 국내총생산(GDP) 규모에 육박할 기세다.

우리나라의 인구 감소가 본격화하면서 현 정부 4년여 동안 초·중·고생 숫자가 10% 이상 줄었다. 이런데도 교육청에 배당되는 교육 예산은 41%나 폭증했다. 예산이 넘쳐나자 시·도교육감들이 ‘교육재난 지원금’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10만∼30만 원씩 나눠주었다. ‘학생’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학부모들에게 찔러준 것이다. 홍 장관은 국가 재정 운용의 최종 책임자이니 그에게 묻고 싶다. 나라 재정이 이런 식으로 쓰여도 되는 것인가. 재정이 이런 식으로 오·남용되고 있다면 홍 장관은 예산 집행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해야 마땅하다. 도대체 언제부터 나라 곳간이 특정 세력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는지 궁금하다.

홍 장관 스스로 길을 터놓았으니 ‘닥치고 기본소득’의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라도 된다면 ‘빵과 서커스’가 나라를 집어삼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요즘 일본에서 야노 고지(矢野康治) 일본 재무성 사무차관이 분게이?주(文藝春秋) 11월호에 기고한 ‘이대로라면 국가재정이 파탄날 것’이라는 글이 화제다. 이렇게 쓰고 있다. ‘국가 공무원은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는 충복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를 주저하는 것은 중국 왕조의 환관, 혹은 무위도식하며 혈세나 도둑질하는 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녹이 공복에게 요구하는 책임의식 아닌가.

홍 장관은 새까만 후배라지만 기재부에 재직했던 신재민 전 사무관을 모른다고 발뺌하지 못할 것이다. 신 사무관은 청와대가 기재부를 상대로 적자 국채를 발행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내용을 폭로하면서 옷을 벗어야 했다. 그는 나중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가의 녹을 받으며 일했다는 부채 의식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고 행동 동기를 설명했다. 불행히도 홍 장관에게서 ‘국가의 녹을 받기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쯤 되면 사심이 공(公)을 덮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