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석 워싱턴 특파원

지난 5일 민주당이 주도하는 미국 하원은 1조2000억 달러(약 1424조 원) 규모의 인프라 예산법안을 통과시켰다. 8월 상원에서 민주·공화 양당의 초당적 지지로 통과돼 하원으로 넘어온 지 약 3개월 만이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노후화된 미국 내 도로·철로·교량·인터넷 등을 현대화할 수 있는 법안 통과에 “기념비적 걸음을 내디뎠다”며 격정적으로 환영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최우선 추진 과제인 이 법안 처리가 지연된 것은 다름 아닌 여당 민주당의 내분 때문이었다. 조 맨친 등 온건파 상원의원들이 재정 악화 등을 이유로 3조5000억 달러 규모 사회 보장성 예산법안에 반대하자 당내 진보진영에서 인프라 법안을 볼모 삼아 3개월 가까이 법안 처리를 지연시켰다. 출구가 보이지 않던 신경전을 끝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선거 패배였다. 내년 중간선거 전초전 격인 지난 2일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은 지난해 대선에서 10%포인트 차로 승리했던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패했다. 텃밭에서 선거 초반 여유 있게 앞서다 당한 패배는 ‘굼뜬’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 지도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민주주의 본산 미국에서도 민주주의는 최근 안팎에서 도전받고 있다. 먼저 민주주의 근간인 선거제도에 대한 불신이 심화했다. 1월 의사당 난입 사태가 진압되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측에서 제기한 60건 넘는 불복 소송이 1건 빼고 모두 기각됐지만 선거 불신은 여전하다. 지난 9월 CNN 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의 78%는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트럼프 전 대통령 주장을 지지했다. 민주당 지지자도 ‘선거가 국민의 뜻을 반영한다’는 응답률이 69%에 불과하다. 인프라 법안 처리에서 드러났듯 민주주의는 합의를 얻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에 바이든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등은 민주주의가 더는 경쟁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거로 뽑힌 위정자가 국민 아닌 특정인이나 세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일도 허다하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법부 같은 제도적 견제장치를 공격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하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는 선거라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불완전한 제도가 생명력을 얻는다. 지난 2일 겨울비 내리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정부청사 투표소에서 만난 40대 미국인 유권자는 “트럼프도 싫지만 바이든은 무능하고 민주당은 싸우기만 한다. 심판해야 한다”며 빗속에도 투표소를 찾은 이유를 밝혔다. 유권자들의 관심에 이번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의 사전투표율은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국민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다.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며 선거제를 비판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다시 권한 없고 의무만 있는 노예가 될지라도 선거 때만은 냉정하게 심판하는 주인 역할을 해야 한다. 4개월 앞으로 대선이 다가왔다. 유독 이번 대선에는 ‘찍고 싶지 않은 후보만 있다’는 국민이 많다. 하지만 정치인은 투표하지 않는 국민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잠시나마 국민의 눈치를 보고, 굼뜬 엉덩이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꼭 투표할 것을 당부한다.
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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