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일 이사장 100일 때 찍은 가족사진.
이미일 이사장 100일 때 찍은 가족사진.
■ 보고싶습니다 - 아버지 이성환

아버지! 저 미일입니다. 둘째 딸로 태어난 저에게 마음이 예뻐야 한다며 아름다울 ‘美’에 하나 ‘一’ 자로 소중한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 지금까지 아버지의 그 온전한 사랑은 제 마음속 깊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보지도 못한 세월이 어느새 72년이 넘었습니다. 세월은 하염없이 흘러 돌잡이가 백발의 노인이 됐건만 아직도 아버지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은 정녕 믿기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느 하늘 아래에 계신지요. 끔찍이도 사랑하셨다는 어머니와 세 딸을 두고 강제로 끌려가신 아버지! 그 기막힌 세월을 어떻게 사셨는지 가슴이 미어질 뿐, 안부를 여쭙기조차 송구합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정치보위부원 ‘유 소좌’라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잠시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해서 아버지는 순순히 집에서 입고 있던 여름옷 차림에 고무신을 신고 따라가셨다지요. 어머니는 그 길이 아버지와 영영 이별의 길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셨답니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백방으로 아버지 소식을 알아보려고 애쓰셨지만, 북에서 지령이 내려와 안전지대로 대피시켰다는 전언 외에 그 어떤 소식도 알 길이 없으셨답니다. 9·28수복 후 아버지 시신만 찾으면 세 딸과 같이 죽겠다는 결심을 하고 시신이 있다는 곳마다 정신없이 찾아다니셨지만, 그 어디에도 아버지의 흔적은 없었답니다. 휴전회담을 통해 납북자들이 돌아올까 마지막 희망을 거셨지만, 그마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엔군 측은 승패 없는 휴전회담에서 북한군 측에 납북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뿐 아니라 납북자는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전쟁 중 창립된 가족회의 임원이 되셔서 전쟁납북자 구출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한시도 아버지를 잊고 산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잡혀가신 그곳에서 오늘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0년부터 남북한 화해정책 추진 과정에 한반도 평화문제도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져 내린 저는 2000년 어머니의 뒤를 이어 가족회를 재결성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머니는 저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셨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가족회는 휴전회담에서 미제로 남겨진 북한의 납북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6·25전쟁 종전과 한반도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의 때를 대비해 준비해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온갖 애를 쓰시던 어머니도 이제 100세가 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께서 2017년 임진각에 세워진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개관식에 휠체어를 타고 참석한 후 지금은 누워만 계십니다. 그런데도 의식이 예전과 다름없이 분명하셔서 다 알아들으시니 아직도 아버지의 소식을 기다리시나 봅니다. 아버지! 지금도 고우신 어머니의 평생 사랑은 오직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우리 가족이 아버지를 꼭 다시 만나 못다 한 사랑의 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정말 보고 싶습니다.

이미일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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