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남자의 클래식 - 팔레스트리나

‘교황 마르첼로 미사’작곡 헌정
지도자들 ‘다성음악 퇴출’ 철회

기혼 탓 바티칸서 추방 됐다가
베드로 성당 음악감독에 복직
1586년 교황전속 작곡가 영예


1545년 이탈리아의 북부도시 트렌트에서는 가톨릭 공의회가 열렸다. 무려 18년간이나 열린 이 회의에서는 교회음악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작금의 교회음악가들이 교회음악의 본질인 기도문(가사)의 명확한 전달은 등한시한 채 세속적이고 화려한 음악적 유희만을 쫓는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교회음악은 여러 성부의 선율이 어우러지는, 이전의 음악양식보다 복잡한 구조의 다성음악(Polyphony)이 보편적이었는데 이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레고리안 성가로부터 시작해 오랜 시간 발전하며 열매를 맺은 교회의 다성음악이 교회에서 축출될 위기를 맞은 것이었다. 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한 작곡가가 나타나 다성음악 양식을 사용해 작곡한 ‘교황 마르첼로 미사’라는 작품을 들려줬다. 성스럽고 아름다우면서도 가사전달까지 명확한 음악에 매료된 교회의 수장들은 ‘다성음악의 퇴출’이라는 안건을 철회하게 된다. 훗날 ‘교회음악의 구원자’ 혹은 ‘교회음악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이 작곡가의 이름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1525∼1594)다.

팔레스트리나는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작은 마을, ‘팔레스트리나’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지만 태어난 마을의 지명을 따 팔레스트리나로 불린다. 팔레스트리나는 12살이 되던 1537년, 로마의 4대 성당 중 하나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으로 입단한다. 변성기가 오자 더 이상 소년 성가대에 머무를 수 없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19살이 되던 1544년, 고향의 산타 아가피토 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봉직하며 작곡을 병행하기 시작한다. 이후 26살이 되던 해, 그는 바티칸의 줄리아 소년성가대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며 교회음악의 중심부로 편입하게 된다.

그러던 1555년 어느 날, 새로 즉위한 교황 마르첼루스 2세는 바티칸의 모든 성가대원을 한 명도 빠짐없이 불러 모아 엄명을 내렸다. 그 내용인즉슨 세속적인 음악의 즉각적인 추방과 복잡한 음악 대신 기도문들의 가사 전달에 보다 힘써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팔레스트리나는 교황의 훈시에 크게 탄복하고 공감해, 후에 반드시 이에 부합하는 음악을 작곡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르첼루스 2세는 재위한 지 불과 22일 만에 서거했고, 뒤를 이어 교황 바오로 4세가 즉위했는데, 새 교황은 기혼 남성은 교황청의 성가대에서 봉직하는 것을 금하는 명을 내린다. 기혼자였기에 바티칸에서 추방된 팔레스트리나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음악감독으로 부임했고, 1562년 음악적 지침과 영감을 줬던 마르첼루스 2세를 기리기 위해 그 유명한 ‘교황 마르첼로 미사’를 작곡해 헌정했다.

46세가 되던 1571년에는 다시 바티칸 베드로 성당의 음악감독으로 복직했고 1586년에는 ‘교황 전속 작곡가’라는 생애 최고의 영예를 받았다. 전 생애를 통해 교회음악에 헌신한 뒤 성 베드로 대성당 내의 ‘카펠라 누오바 베드로의 묘’ 옆에 안장된 그에 대해 바티칸은 묘비문에 ‘음악의 왕’이란 문구를 새겼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 오늘의 추천곡 - 교황 마르첼로 미사

팔레스트리나의 전 작품 중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곡으로 1562년 작곡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연은 1565년경으로 여겨지며 팔레스트리나가 1567년에 출판한 두 번째 미사곡집에 들어 있다. 시종 온화한 템포와 고상한 곡의 전개는 보수적인 가톨릭 전통에 부합하는 한편, 다성음악의 르네상스적 색채미는 가사와 선율에 생동감을 더해 이상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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