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은 세종대왕 시절부터 ‘그릇’이었다. 방언에는 ‘그륵’도 많이 나타나는데 끝소리만 달라졌을 뿐 같은 계통이다. ‘기명(器皿)’이나 ‘식기(食器)’도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릇에 해당하는 한자어이니 결국 전국적으로 그릇이 쓰이고 있다. 나무, 흙, 금속 등 재료가 무엇이든 음식을 담아 상에 올리도록 만들어진 모든 도구가 그릇이다. 재료는 무엇이든 가능하다지만 흙으로 빚어 구운 사기와 구리와 아연을 섞어 두드려 만든 놋그릇이 가장 흔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재료에 변화가 나타났는데 현대에 흔하게 접하게 된 것 중 하나가 양은(洋銀)이다. 양은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서양의 은이다. 그런데 아무리 서양의 기술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은을 식탁에 올리는 것은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양은은 은이 아니라 구리에 니켈과 아연을 첨가한 합금이다. 고유의 은백색이 은과 비슷해 양은이라 하지만 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 양은이 이 땅에서 한바탕 더 변모를 겪는다. 양은은 색깔 때문에 양백(洋白)이라고도 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양은 냄비나 막걸리 잔은 황금색이다. 엉뚱하게도 이 냄비나 잔의 재료는 은도, 양은도 아닌 알루미늄이다. 알루미늄의 색은 은과 비슷하나 양은과 달리 부식이 잘 되니 황금색으로 도금한 것일 뿐이다.

오늘날 은으로 만든 식기는 돌잔치 선물로나 가끔 등장하는 은수저 정도다. 비싼 만큼 값어치를 한다지만 관리가 힘든 그것을 굳이 쓸 필요는 없다. 튼튼하고 녹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그릇의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으니 양은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다만 라면은 양은 냄비에 끓여야 제맛이라고 믿는 이,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의 막걸리를 양은 잔에 따라 마셔야 운치가 있다고 믿는 이들이 쓰고 있다. 수학적으로 거짓의 거짓은 참이지만 가짜 은의 가짜 은인 우리의 양은은 여전히 거짓이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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