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와 소통하는 ‘개정판의 세계’

젠더 이슈 주목받으면서
‘욕구들’ 초판의 5배이상 팔려
英콜레라 사태 다룬 ‘감염도시’
코로나 공포와 맞물려 재출간

스타 작가 인기 얻기 전 저작
뒤늦게 개정판 내고
독자가 절판된 책 출간 설득
‘양장본→종이책’가격 낮추기도


지난 5월 출간된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 ‘욕구들’(북하우스)은 15년 만에 ‘새 옷’을 입고 태어난 개정판이다. 젊은 여성의 다이어트 강박증을 사유한 초판과 비교해 내용이 달라진 건 없다. 편집과 번역을 수정하고 제목을 ‘세상은 왜 날씬한 여자를 원하는가’에서 ‘욕구들’로 바꿨다.

그런데도 판매량은 5배 차이가 났다. 2006년도 초판이 1쇄 물량인 2000부만 팔리고 절판된 반면, ‘욕구들’은 벌써 1만 부 이상 나갔다. 이에 대해 허영수 북하우스 국장은 “젠더 이슈가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15년 전 많은 독자의 선택을 받기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책’이었다”며 “여성들의 연대의식이 높아지고 3040 여성이 출판 시장의 핵심 수요자로 부상하며 책의 가치가 재조명받고 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해 국내에 출간된 냅의 유작 에세이집 ‘명랑한 은둔자’(바다출판사)가 입소문을 타고 화제작이 되면서 형성된 저자의 인지도와 팬덤 덕분이기도 하다.


◇시대 달라지면 ‘포장’만 바꿔도 판매량 ‘껑충’

‘개정판, 증보판, 신장판, △△주년 기념판….’ 오래전 나온 책을 재출간하는 경우 출판사들은 흔히 책 띠지나 날개에 이런 ‘홍보 문구’를 적는다. ‘도판을 추가해 올 컬러로 인쇄했다’거나 ‘전면 개정이 무색할 정도로 완전히 고쳐 썼다’는 식의 설명이 따라붙는다. 예스24에 따르면 올해 나온 책 가운데 ‘개정판’으로 분류되는 종수는 무려 1만4000권. 새 단장을 하고 독자와 만나는 개정판의 존재 의미와 유형별 특징은 무엇일까.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이란 생산자와 독자의 ‘대화’”라며 “개정판은 더 나은 결과물로 독자에게 말을 건네려는 고민의 집약체”(이정우 책과함께 인문교양팀장)라고 말한다. 단순한 ‘내용 업데이트’부터 절판된 책을 다시 내달라는 열혈 독자의 ‘팬심’에 부응한 경우까지 다양한 ‘개정판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19세기 중반 영국 런던을 덮친 콜레라 사태를 되짚은 ‘감염 도시’(김영사)는 ‘욕구들’처럼 시대 변화에 발맞춰 재출간된 사례다. 출판사는 코로나19 사태로 대규모 감염병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한 지난해 봄 개정판을 출간했다. 이 책 역시 내용은 크게 바뀐 게 없는데도 초판보다 3배나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김윤경 김영사 이사는 “보통 개정판은 미디어에서 ‘리뷰’로 소개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감염 도시’는 시기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기획 덕분에 TV·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유튜브 독서 채널 등에서 많이 다뤄졌다”고 설명했다. 올해 초 20년 만에 재출간된 SF 소설 ‘듄’(황금가지) 역시 동명의 영화 개봉에 힘입어 교보문고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며 ‘판매량 역주행’을 펼쳤다.

◇‘스타 작가’ 부상에 前作 재출간

저자가 뒤늦게 ‘스타 작가’로 부상한 경우 출판사가 ‘한껏 높아진 인지도’를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 과거 저작을 재출간하기도 한다. 미국 칼럼니스트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어크로스)가 대표적이다. 어크로스는 와이너의 철학 교양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20만 부 이상 팔릴 만큼 선풍적 인기를 끌자 지난 2008년 다른 출판사가 선보인 여행 에세이 ‘행복의 지도’를 개정판으로 내놓았다. 위대한 천재를 길러낸 도시 이야기를 담은 와이너의 또 다른 책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 역시 3년 만에 ‘천재의 지도’(문학동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절판을 아쉬워하는 독자나 출판계 인사의 ‘팬심’이 재출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달 말 나온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난다)는 1989년 이후 32년 만의 증보판. 동료 시인으로서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날카로운 언어로 드러낸 최승자의 글에 매료된 김민정 난다 대표가 재출간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증보판에 수록된 ‘시인의 말’은 병원에 입원 중인 최 시인이 수화기 너머로 힘겹게 불러준 말을 글로 옮긴 것이다. 김 대표는 “2014년 산문집 재출간을 요청해 2019년 허락을 받았다”며 “개정판 교정지를 보며 왜 오래전부터 시인의 절판된 산문집을 보물처럼 챙겨 이사를 다녔는지 느낄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2013년 출간 이후 절판된 김은성 작가의 ‘내 어머니 이야기’(문학동네)는 ‘한국 문단의 인플루언서’ 김영하 소설가가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언급해 새로 빛을 본 만화다. 김영하는 당시 방송에서 “피란 생활, 베트남전 파병, 아들의 학생운동 등 어머니의 ‘입’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재구성한 작품”이라며 “세상엔 사라져서는 안 되는 책들이 있다. 누군가 꼭 다시 내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마음을 드러냈다.

◇‘양장’→‘종이책’으로 바꿔 가격 낮추기도

역사가 피터 프랭코판의 ‘실크로드 세계사’(책과함께)처럼 초판을 ‘양장 벽돌책’으로 출간했다 ‘종이책(페이퍼백)’으로 분권해 가격을 낮춘 경우도 있다. 동서양 만남과 제국의 흥망성쇠를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되짚은 책은 2017년 1000쪽이 넘는 양장으로 선보인 뒤 2년 만에 내용은 그대로 둔 채 3권짜리 세트로 재단장했다. 개정판 세트 가격은 3만3000원으로 초판보다 2만 원이나 저렴해졌다. 물론 가장 흔한 개정판 유형은 ‘정보·그래픽 수정·보완’이다. 최근 나온 유시민 작가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돌베개)는 30년 이상 축적된 정보를 보완한 것은 물론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꾸기도 했다. 그럼에도 출판사 측은 “초판에 담겼던 ‘거꾸로 읽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제목을 바꾸지 않았다. 지난 10월 재출간된 ‘역사의 원전’(바다출판사)은 2500년 인류사를 ‘원전’을 통해 추적한 기록으로 각 사건의 장면을 담은 진귀한 도판 100여 장을 추가해 현장감을 높였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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