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이탈리아기행, 45×32㎝, 혼합재료.
김병종, 이탈리아기행, 45×32㎝, 혼합재료.


■ 김병종의 시화기행 - (100) 로마, 콜로세움에서 목욕탕까지

네로 죽음 뒤 정치적 대혼란
집권층, 민심 다독이기 위해
궁전 터에 원형 경기장 건립
시민들, ‘살인 라이브’ 열광

목욕탕도 또 하나의 포퓰리즘
도시 내 170여곳이나 세워져
독서실 등 갖춘 종합 레저공간
황제 목욕탕에 빈민층도 출입


빠른 유속의 물이 흐르는 다리 위에서 젊은 남녀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서로의 눈을 들여다본다. 카메라의 렌즈가 스틸로 잡아낸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그들의 뒤로는 검은 콜로세움이 거대한 성처럼 서 있다.

이 구도 속에서 나는 문득 시간의 병렬이나 대칭을 본다. 저만큼에 천 년 제국이 있고 이만큼에서 순간의 정경이 흘러가고 있다. 이 시간의 공시성 앞에서 과거와 현재는 우리의 시인 이상이 말한 대로 ‘일대 관병식’이다. 물은 어느 먼 산으로부터 흘러와 콜로세움을 휘돌며 이 지점까지 왔을까.

조금 전 나는 로마 황제가 세운 목욕탕 중 하나를 둘러보고 왔다. 트라얀 배스(Trajan’s Baths). 뻘쭘하게 키 큰 소나무 사이로 드러난 짐승의 뼈 같은 건물의 잔해 위로는 검은 까마귀가 날고 있었다. 그 목욕탕에서 지척에 콜로세움이 산처럼 서 있는 것이다. 콜로세움, 그 엄청난 건축물은 어떻게 생겨났던 것일까.

로마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로마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AD 68년 네로 황제의 자살 후 로마는 1년 반 사이에 자그마치 황제가 네 명씩이나 바뀌는 정치적 대혼란을 겪게 된다. 로마의 3분의 2가 초토화된 대화재 사건 이후, 집권층은 로마의 권위를 회복하고 민심을 다독일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론이 없었다. 이윽고 새로 즉위한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궁전에 있던 인공호수 자리에 엄청난 규모의 원형극장을 세울 구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사후 아들 티투스 황제에 의해 그 구상이 실현된다. 이탈리아인들이 콜로세오(Colosseo)라고 부르는 저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이 세워지게 된 배경이다.

아들 티투스는 거대한 건축물을 3층까지 완성하는데 아버지 황제의 1주기를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를 백일 동안에 걸쳐 열게 된다. 저 무자비하고 끔찍한 검투사 시합이 바로 백일간의 정점을 찍는 일이었다. 피를 부르는 이 살인의 라이브에 관중들은 열광했고 그럴수록 점점 더 경기는 자극적으로 변해갔지만 누구 하나 그 광기의 흐름을 멈출 수 없었다. 검투사 시합이야말로 로마인의 기상을 만방에 다시 드높이고 전투의식을 고양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또한 이 잔인한 시합을 법으로 금지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한 수도승은 시합 중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가 관중석을 향해 이 살인의 경기를 멈춰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지만 흥분한 군중은 야유를 퍼붓고 그를 돌로 쳐 죽이는 일까지 생겨나게 된다. 이 눈먼 광기의 흐름은 로마가 망하기 40여 년 전에야 겨우 끝나게 된다.

비록 숯 굽는 움막처럼 뼈대로만 서 있지만 검투사들의 훈련장과 숙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목욕탕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마치 경기장에서 흘린 피를 씻어내도록 배려라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씁쓸하다. 황제의 목욕탕에서 씻어야 할 것은 검투사의 피가 아니라 그 죽음의 현장에 열광하는 로마 시민들의 광기가 아니었을까. 콜로세움이 민심을 결집하는 황제의 포퓰리즘 전략의 하나였다면, 로마의 목욕탕 또한 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황제의 중요한 정책이고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김병종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김병종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BC 33년경, 어쨌거나 당시 작은 도시였던 로마에 무려 170여 개에 이르는 목욕탕이 세워졌다고 하니 가공할 만한 일이었다. 더구나 200년경에 세워졌다는 카라칼라 대욕장은 한꺼번에 16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목욕탕의 규모가 크고 화려할수록 황제의 위용도 높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쨌든 로마에 11개의 수로교가 뚫리고 그리스의 선진 문화였던 목욕탕이 들어옴으로써 이 또한 황제의 선물로 인식됐던 것인데 특히 황제의 이름이 붙은 목욕탕에는 회당과 산책로 그리고 독서실과 연회장을 비롯, 체육실까지 갖추었다고 하니 일종의 종합 레저공간이자 여론 형성의 장 역할까지 했던 것 같다.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시민권에 그토록 자긍심을 가졌던 것도 이처럼 다양하고 특별한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집트산 대리석에 프레스코 벽화까지 설치한 황제의 목욕탕은 뜻밖에 빈민층도 출입할 수 있도록 입장료를 저렴하게 책정했다고 한다. 확실히 목욕탕 포퓰리즘이 시행됐던 듯하다.

그러나 경쟁적으로 크고 화려해지고 남녀 혼탕에 취침룸까지 갖추게 되면서 목욕탕은 몸을 청결하게 한다는 그 본래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결국 후대에 로마는 목욕으로 망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까지 이르고야 만다.

선혈이 낭자한 격투기장과 그 피를 씻어낼 만한 목욕탕이 마주 보고 있다. 그 사이로 로마의 근위병들처럼 서있는 키 큰 소나무 아래 풀밭에서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공을 차고 논다. 역사와 시간이 다시 수평 구도 속에 나란히 서 있는 순간이다.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로마 대욕탕의 원형인 영국의 배스.  구글이미지
로마 대욕탕의 원형인 영국의 배스. 구글이미지

■ 로마의 목욕탕

BC33년 율리아 수로 뚫리며 ‘붐’… 공중목욕탕서 하루 물 5억t 소비


목욕탕은 원래 그리스에서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온천욕과 냉온욕으로 많이 행해졌다. 로마의 목욕탕은 BC 33년 율리아 수로가 뚫리면서부터 붐을 일으키게 되는데 나중 수많은 목욕탕이 생기면서 로마에서 사용되는 하루 10억t 넘는 물의 반이 공중목욕탕에서 소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네로 시대 전후로 화려하고 웅장한 목욕탕이 많이 생겨났는데 목욕 시설뿐 아니라 체육실과 연회실, 심지어 산책로까지 갖추게 됨으로써 ‘포름’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

로마 대욕탕의 원형은 영국의 배스(Bath)에서 그 유형을 볼 수 있는데 거대한 코린트 양식의 기둥들과 웅장한 건축 양식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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