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의 2021년이 저물어 간다. 이맘때면 쏟아져 나오는 트렌드 전망서들은 하나같이 “변화의 시기, 제대로 준비한 사람은 날아오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나락으로 떨어진다”며 ‘변화’를 조언하고 있지만 꼭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19 시대엔 ‘노력과 성취’라는 인과사슬이 기존 방식대로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깊어진 좌절 속에 올 한 해 많은 사람이 ‘판타지’의 세계로 날아갔다. 2021년 우리 문화를 장악한 키워드는 ‘현실’을 넘어선 ‘판타지’였다.
대세는 세계적 대히트를 기록한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어두운’ 판타지였다. 인간 욕망을 닮은 괴물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드라마 ‘스위트홈’은 지난 연말 공개돼 올해 시작을 뜨겁게 달궜고, 거대한 판돈을 놓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오징어게임’,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초자연적 지옥을 이 땅 위에 재현한 드라마 ‘지옥’으로 이어졌다. 이들 드라마는 현실의 충격과 좌절, 공포를 더 강력한 충격과 공포로 찍어 누르는 ‘다크 판타지’였다.
반면 서점가에선 부드러운 판타지, 힐링 판타지들이 대세였다. 최근 교보문고가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내놓은 2021년 출판 키워드는 ‘꿈’이었다.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은 잠들어야 갈 수 있는 백화점에서 꿈을 사고파는 판타지 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었다. 이 작품은 1·2권을 합해 2020년대 들어 100만 부 이상 팔린 첫 한국소설이기도 하다. 베스트셀러 종합 3위를 차지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역시 실제로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경험하게 하는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자정의 도서관’ 이야기다. 이 도서관 서가엔 한 사람이 자기 인생에서 선택하지 않아 후회하는 다양한 삶을 담은 책들이 꽂혀 있고, 그 책을 펼치면 그 삶을 살아볼 수 있다.
이들을 포함해 올 한 해 판타지 소설 판매량은 전년에 비해 무려 120% 가깝게 증가했다. 급성장 중인 웹소설에선 이미 판타지가 대세지만 기존 소설시장에선 유독 판타지 장르가 자리 잡지 못했던 점을 생각하면 주목할 만한 결과다. 디지털 시대, 현실과 가상이 뒤섞이는 메타버스가 현실이 된 실제 상황이 반영된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지만 코로나19라는 견딜 수 없는 공포스러운 현실이 우리를 이 세계로 이끈 탓이기도 하다.
영문학자 조너선 갓셜은 인류는 진화 역사 내내 이야기를 통해, 실제 경험할 수 없는 숱한 현실을 시뮬레이션해봄으로써 안전하게 삶을 연습하고 사회적 도덕을 배우며 현실을 살아낸다고 했다. 한때 유망 수영선수였고, 재능 많은 가수였지만 지금은 파혼하고, 해고되고, 기르던 고양이마저 죽어 스스로 삶을 포기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주인공은 이 도서관에서 살아보지 못한 삶들을 경험한 뒤 인생의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을 이해하며 지금 자리에서 자기 길을 만들어가려 한다. 끝이 보이는 듯했던 코로나19가 다시 우리를 덮친 위기 속에 한 해를 보낸다. 이 좌절과 고통 속에서 우리는 상상의 세계를 열어 공감하고, 위로받고 스스로를 단련하며 이 시간을 견뎠다. 이젠 갓셜의 말처럼, 이 힘으로 2022년 새해를 지혜롭게 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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