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준 前 외교부 차관보 북핵대사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는 직업군인이 없었고, 매년 추첨으로 로마 시내 행정구역 중 2개를 선정해 그 지역 청장년 남자 전원을 군인으로 징집했다. 그들은 1년 복무 후 모두 생업으로 돌아갔고, 원로원이 선출하는 임기 1년의 집정관 2명이 번갈아 맡았던 총사령관도 함께 교체됐다. 전시에도 원칙은 그대로여서 매년 신임 총사령관과 신병들로 구성된 새 군단이 편성돼 전쟁을 이어갔다.

로마군의 그런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대는 거의 무적이었다. 주로 용병으로 병력을 충원했던 타국들과 달리 시민병 제도를 택했던 로마는 자기 나라를 스스로 지킨다는 병사들의 의지와 자부심이 강했고, 오늘날의 총리에 해당하는 집정관들은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걸고 최전선에서 군단을 직접 지휘하며 생사고락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런 로마가 쇠퇴기에 접어들자, 방대한 인구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의 안보 불감증과 징집 회피로 제국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채우기 어려웠다. 그래서 로마의 주적(主敵)이던 게르만족 용병을 채용하기 시작했고 차츰 장교까지 충원하더니, 급기야는 게르만 용병 출신 오도아케르가 로마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그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서기 476년에 멸망한 것은 국방 의지를 상실한 국가가 맞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국가가 주권과 영토를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3요소가 긴요하다. 첫째는 나라를 지키려는 국방 의지, 둘째는 정부와 군의 전쟁 지휘 능력, 셋째는 효과적인 무력 수단, 즉 병력과 무기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방 의지와 전쟁 지휘 능력이다. 세 번째 요소도 중요하긴 하나, 앞의 두 요소가 부실하면 쓸모없는 장식품이자 값비싼 장난감일 뿐이다. 거대한 병력과 화려한 무기로 치장된 군대가 강인한 의지와 전략으로 무장된 소규모 군대에 참패한 사례는 알렉산더 대왕 이래 차고 넘친다.

최근 수 개월 새 한국의 국방 의지와 전쟁 지휘 능력에 대한 쓴소리가 버웰 벨, 커티스 스캐퍼로티, 빈센트 브룩스, 로버트 에이브럼스 등 전임 주한미군 사령관들로부터 쏟아지고 있다. 그들의 고언은 △북한 핵에 대한 한국 정부의 무관심 △한반도 안보 현실과 동떨어진 뜬금없는 종전선언 집착 △한미 연합훈련의 장기 부재에 따른 연합작전 능력과 한국군의 지휘통제 능력 퇴보 △전작권을 이양받기에는 역량이 많이 뒤처져 있는 한국군 지휘부 △남북 군사합의 등 대북 관계 개선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한국의 군사적 대비태세 △취약한 미사일 방어망 △주한미군 훈련시설 결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그 목소리들을 관통하는 공통 요소는, 한국 정부와 군의 국방 의지와 전쟁 지휘 능력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으로 집약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는 나라를 위해 미군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북핵과 한반도 방어 책임을 미국에 떠넘긴 채 주적인 북한과 중국의 환심을 사는 데만 혈안인 문재인 정권을 보면, 현재의 한국도 바이든 대통령이 말하는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는 나라”에 속하리란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차기 대선 후보들이라도 선거판의 이전투구에서 벗어나 국가 안보 문제에 한 번쯤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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