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동욱의 지식카페 - (26) 기차 이야기
2차대전중 나치 치하 유대인 어린이들의 피란수단…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 주인공은 기차에 뛰어들어 생 마감
정거장은 정주지가 아닌 유동인구의 공간으로 현대 도시의 얼굴…동화 ‘은하철도의 밤’에선 현실 저 밖으로 여행
세계 대전의 비극과 기차가 얽혀들고 있는 장면을 또 인상 깊게 그려 낸 작품이 W G 제발트의 소설 ‘아우스터리츠’이다.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유대인 어린이들을 영국으로 피란시키는 구명운동이 있었는데, 그것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1930년대 약 1만 명의 어린이가 영국으로 건너와 입양됐다. 그러나 영국까지 기차로 먼 길을 이동하면서 죽는 아이도 부지기수였다. “그 아이는 객실의 창문 구석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어둠 속을 내다보았어요.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심지어 이름조차 몰랐으며 그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 그 아이가 힘이 다 빠져 죽게 되자 짐을 올려놓는 그물망 속에 우리들의 다른 물건과 함께 올려져 있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어요.”(안미현 역)
기차가 무서운 역사적 장면들에 개입하는 일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도 생생하다. 여기에는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실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긴 기차가 한밤중에 어디론가 달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기차는 숨겨진 역사의 틈새들을 보여준다.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는 흥미로운 기차를 기록하고 있는데, 영국의 헤일스워스와 사우스월드 사이를 오가는, 중국의 용이 그려진 궁정 기차가 그것이다. 이런 매우 예외적인 장식을 지닌 기차는 근대의 새로운 기계장치에 빠져있던 청나라 광서제가 주문했다가 취소한 것이다. 갈 곳 없어진 그 특별품은 그 지역 협궤열차가 됐다.
기차는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의 삶에 깊이 들어섰다. 비행기나 자동차의 실용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19세기의 절대적 운송 수단으로서 말이다. 기차는 정념의 차원에서도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이 스며든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보라. 이 작품은 기차와 뗄 수 없는 소설이다. 안나는 기차 정거장에서 연인 브론스키와 처음 만난다. 또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녀는, 첫 장면에서 기차에 치여 죽은 어떤 사람처럼, 기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문득 브론스키와 처음 만난 날 기차에 치인 남자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바퀴와 바퀴 사이의 중간 지점이 그녀와 나란히 온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고는 어깨 사이에 머리를 푹 숙인 채 객차 밑으로 몸을 던져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연진희 역) 그리고 모든 불행이 생기기 이전에 그녀가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장면 역시 기차 옆에서 이뤄진다. 눈보라 속에 기차가 잠시 정차했을 때 안나 앞에 나타난 브론스키는 자신이 그녀를 따라왔노라고 말한다. 그것은 안나가 듣고 싶어 하던 말이었다. “‘당신도 알잖습니까, 당신이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 떠난다는 걸.’ …기관차의 굵은 기적 소리가 구슬프고 음울하게 울려 퍼졌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눈보라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 어떤 풍경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그녀의 영혼이 갈망하던 그 말을, 그녀의 이성이 두려워하던 그 말을 입 밖에서 꺼냈다.”
인간 정서의 영역에 깊이 들어선 기차는 러시아의 이 애욕적인 이야기에서만 핵심적인 것은 아니다. 클로드 모네의 ‘생라자르역’(1877)은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탈고한 바로 그해에 그려졌다. 이 작품은 안나가 살던 시대의 유럽 정거장, 연기 속에 굴절되는 빛 속으로 들어선 기차를 그리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견고한 법칙 아래 보호받지 못하는 운명의 사물들이 오직 덧없는 일순간의 광채와 가변적인 기체로서 존재하는 정거장, 정주지가 아닌 가변적인 익명의 유동인구의 공간이야말로 현대로 들어선 유럽 도시의 진정한 얼굴이다.
이렇게 기차가 인간 정서와 얽혀 있기에, 인간은 서정적 여행을 꿈꿀 때 기차를 떠올리기도 한다. 연인과 마주 앉아 빗방울이 부딪치는 기차의 창문을 바라보기도 하며,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는 철로를 물끄러미 응시하기도 한다.
이런 서정적 여행의 수단으로서 기차는 미야자와 겐지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그가 여러 번 공들여 고쳐 쓰고 유작으로 남긴 동화 ‘은하철도의 밤’은, 별들을 순례하는 또 다른 동화인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친척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기차는 이렇게 서정적으로 움직인다. “달깍달깍 달깍달깍, 작고 예쁜 기차는 하늘 갈대가 바람에 휘날리는 그 속을, 은하의 물과 삼각표의 희고 푸르며 엷은 빛 속을 하염없이, 하염없이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심종숙 역) 이러한 서정적인 기차, 현실 저 밖으로 여행하는 기차는 이후 일본인들의 서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도라에몽 버전의 ‘은하철도의 밤’까지 나왔다). 직접적으로 저 작품의 영향을 받은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에서도 우리는 애상을 담은 채 외로이 우주를 여행하는 기차의 서정을 마주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그런 기차의 서정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치히로가 가오나시와 함께 타고 가는 바다 위의 기차를 보라. 기차는 적막하며 광대한 바다를 고독 속에 천천히, 소리를 죽이고서 미끄러지고 있다.
그러나 기차라는 기계가 이런 서정성을 획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차는 그 크기와 속도만 보더라도 정말 무서운 괴물 아닌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자연의 파괴가 있고서만 철로는 놓일 수 있었는가? 기차가 처음 출현했을 때 그것은 인간의 평온한 정서와 일치하기보다는 기존의 삶을 파괴하는 재앙의 등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기차의 모습을 우리는 일본 근대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쓰메는 기차에 대한 흥미로운 구절들을 남기고 있는데, 본론적인 구절에 앞서 이 이야기부터 해 보고 싶다. ‘산시로’(1909)의 주인공 청년은 상경하기 위해 기차를 타는데, 기차 여행 중 놀랍게도 다 먹은 도시락을 창밖으로 던진다. 그래서 약간의 오물이 고개를 내밀고 있던 어떤 여자 승객에게 튄다. “산시로는 빈 도시락을 창밖으로 힘껏 던졌다. 여자가 머리를 내민 창문과 산시로가 도시락을 던진 창문은 한 칸 건너 바로 옆 칸이었다.”(송태욱 역) 근대의 열차 문화를 담은 이 풍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다 먹은 식사 폐기물을 창밖으로 던져 해결하는 것은 근대의 관행이었던가? 이와 별도로,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기차에 관한 나쓰메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풀베개’(1906)에서 발견된다. 다음 구절은 기차론의 형태를 지닌 문명 비판론이다. “기차만큼 20세기의 문명을 대표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수백 명이나 되는 인간을 같은 상자에 집어넣고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인정사정없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한다. 나는 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기차로 간다고 한다. 나는 운반된다고 한다. 기차만큼 개성을 경멸하는 것은 없다. …나는 기차가 분별없이 모든 사람을 화물과 마찬가지로 알고 맹렬히 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객차 안에 갇혀 있는 개인과, 개인의 개성에 털끝만큼의 주의조차 주지 않는 이 쇠바퀴를 비교하며, 위험하다, 위험해, 하고 주의를 주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문명은 이 위험이 코를 찌를 정도로 충만해 있다.”(송태욱 역) 우리에겐 서정적인 교통수단인 기차가 근대에는 개인의 고유성을 말살하는 냉혹한 기계문명의 디스토피아적 상징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더욱 무시무시한 기계들을 가지게 돼, 기차 정도는 아주 인간적인 것이 돼버렸다.
더 나아가 기차는 현대적인 ‘존재론’을 구현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기차에 관한 아름다운 구절을 보자. “열차는 돌았다…. 내가 장밋빛 하늘의 띠를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하고 있을 때, 맞은편 창에 그것이 새롭게, 그러나 이번엔 붉은색 띠로 나타났지만, 그것도 철도의 두 번째 굴곡에서는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드문드문 반대쪽에 나타나는 스러지기 쉬운 진홍색의 아름다운 아침의 조각들을 결합해서, 그 조각조각을 전체를 이룬 하나의 풍경, 연속된 하나의 그림으로 엮어 새 캔버스에 옮기려고 한쪽 창에서 다른 창으로 뛰어다니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 장면은 질 들뢰즈의 중요한 개념 ‘횡단성(transversalite)’을 구현하고 있다. 저 구절과 관련해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말한다. “기차 여행에서 (각각의 창문마다 내다보이는 여러 개의) 전망들 모두의 통일은… 바로 우리가 ‘하나의 창문에서 다른 창문으로’ 옮겨 가며 끊임없이 관통하는 횡단선 위에서 이룩된다. 그러므로 여행은 장소들이 서로 소통하게 해주지도 않고, 장소들을 결합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장소들이 가진 ‘차이’ 자체만을 모든 장소들에 공통적인 것으로서 확립할 뿐이다.” 기차의 창문들 각각처럼 세계는 전체를 이루지 않는 파편들, 차이뿐이다. 전체성은 주인공이 한 창문에서 다른 창문으로 옮겨갈 때의 그 ‘횡단선’에서 생성된다. 그러니 횡단선을 따라 생기는 이 전체는 파편들을 통일하는 원리 같은 것이 아니라, 파편들의 차이로 이뤄진 전체다. 그것은 하나의 원리도, 법칙도 없는 오로지 다양성으로만 이뤄진 우리 세계의 모습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횡단선 : 미국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1936∼)의 ‘다른 기차들’은 미니멀리즘 음악의 걸작 가운데 하나다. 미니멀리즘 특유의 속도감과 단순화된 반복이 기차의 운동을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다.
들뢰즈의 ‘횡단선’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다자(多者)가 연결되는 방식이다. ‘막힌 부분들 사이의 통행 체계’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행은 다양한 장소의 횡단선이고, 꿈은 다양한 시절의 횡단선이다. 여행은 파편적으로 흩어진 여러 지역을 연결한다. 한 번의 잠 속에 나타나는 여러 꿈은 서로 관계없는 시절들과 환상들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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