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만들기보다 추억 만들기’는 여행 중에 탄생한 명언(?)이다. 굽은 도로여서 끝자락부터 눈에 들어왔고 버스가 움직이면서 시야에 잡힌 뒷자리 세 글자는 ‘만들기’였다. 그리고 잠시 후 ‘억’ 자가 보였다. 음악동네라면 ‘내 마음 보여줘 본 그때 그 사람/ 사랑하던 나의 그 사람’(김현식 ‘추억 만들기’ 중)이 배경음악으로 딱 어울리는데 무심한 철골 입간판엔 추억 대신 1억이 적혀 있었다. 삶의 각오를 다지게 하는 반전의 조합이었다.
웬만한 방송사 오디션의 1등 상금도 최소 억 단위다. ‘내일은 국민가수’(TV조선)는 1등 상금이 3억 원이다. 제1회 MBC대학가요제(1977) 1등은 상금이 50만 원이었고 2등은 30만 원, 3등은 15만 원이었다. 요즘은 돈의 단위뿐 아니라 시상범위도 달라졌다. 1등과 2등의 차이는 숫자 1에 불과한데 상금은 아바의 노래 제목처럼 ‘승자독식’(The winner takes it all)이 대세다. 이어지는 노래 가사에서도 ‘패자는 초라하게 서 있을 뿐’(The loser standing small)이다.
상 받은 자 옆에 상처받은 자가 언제나 서 있는 건 아니다. 경연장에선 실력을 드러내지만 시상식에선 인성이 드러난다. 국민가수 2등 김동현은 숯불총각이란 별명답게 가수로서의 고음질에 곁들여 인간의 품질이 풀무질로 판가름 난다는 걸 보여줬다. 인터뷰에선 전설의 경영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체취도 풍겼다. “감옥과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돼 있지만 그 차이는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뿐이다.” 가끔은 나도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상상해본다. 지옥은 말이 많고 천국엔 노래가 많을 것 같다. 천국엔 감사함(손잡을 사람)의 명단이 나돌고 지옥엔 억울함(손볼 사람)의 리스트가 넘칠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가 놀란다. “세상에 이렇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많다니.” 따라서 가창력만큼 선곡이 중요하다. 자기에게 맞는 노래를 공들여 찾아내야 한다. 영화라면 배역에 해당한다. 주인공을 맡는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자기에게 맞는 역할(적역)이 배우로서의 생명력을 연장시킨다. 가수도 마찬가지다. 잘 소화할 수 있는 노래, 히트한 노래보다는 묻혀 있던 보석 같은 노래를 발굴해서 새롭게(창의) 열심히(성의) 불러야 평가에 유리하다.
김동현의 선곡 여정을 따라가 보자. 예심 첫 곡은 부활의 ‘비밀’이었다. ‘비밀처럼 계절이 흘러/ 상처들이 아물어가면/ 설레이던 너는 설레이던 너는/ 한 편의 시가 되고’ 부질없던 삶을 돌아보며 과거의 청산을 다짐하는 기폭제로 적당한 노래다. 부질없다는 말은 불질이 없다는 말이다. 대장간에서 강하고 단단한 쇠를 만들기 위해서 쇠를 불에 달궜다가, 물에 담갔다가를 반복하는 게 불질이다.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다 나가봤고 거기서 수없이(이유 없이?) 탈락했지만 마음속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한 부활의 과정이 불질이었으니 숯불총각의 서사가 돋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체절명의 기로(데스매치)에선 신용재의 ‘가수가 된 이유’를 불렀다. ‘이 몇 분짜리 노래가/ 별거 아닌 가사가/ 니 귓가에/ 니 마음속에 울려 퍼지기를/ 미치도록 기도해’ 그래서 가수는 4분에 목숨을 건다. 최종 인생곡은 허각의 ‘나를 사랑했던 사람아’다. 팬이란 ‘니가 있어서 나는 항상 웃을 수 있었고/ 니가 있기에 내가 가장 행복했었고/ 너로 인해 내 삶도 살아볼 만했었’던 존재다. 하지만 초심을 잃으면 ‘하루에 수백 번씩 나 후회를 하고/ 네가 없다는 걸 느끼며 나 매일을 살아’야 하는 게 가수의 운명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2등 김동현은 “내가 1위가 됐다면 미안했을 것”이란 말도 했다. 미안함을 강요하는 시대에 “지금의 위치로 충분하다”도 아니고 “지금의 위치도 과분하다”는 청년의 진심이 숯불처럼 파고든다. ‘유명하고팠던 이유는/ 오직 단 하나뿐이니까/ 니가 날 보고/ 날 알아듣고/ 내 생각하라고’(‘가수가 된 이유’ 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