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립습니다 - 정난순(1944∼2017)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저의 어머님 정난순 여사의 애창곡은 국민가수 이미자 씨의 ‘여자의 일생’(1968)이었습니다. 생전 노래를 부르실 때면, 늘 이 노래를 앞서 부르시곤 하셨지요. 그러던 어느 때인가 노랫말을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어쩌면 이 노랫말은 요즘의 세태와 동떨어진 ‘시대착오적인 내용’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생전 어머님의 생각에 비춰 봐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노랫말에 속 깊게 공감하시는 듯, 늘 즐겨 부르셨지요.

어머님은 맏아들인 저를 스물넷에 시댁인 전북 익산시 황등면에서 출산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님 나이 서른에 아들 삼 형제를 모두 출산하셨지요. 제가 못 말리는 개구쟁이였던 6∼7세에 잠시 할아버님댁에 맡겨져 자란 적이 있었는데, 아마 어머님이 생계를 꾸리며 어린 삼 형제를 함께 돌보는 것이 감당하기 힘들어서였을 겁니다. 그런 우리 가족은 제가 초등학교 시절까지 단칸방을 전전할 만큼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그 당시 전교 우등생이었던 저는 어머님의 커다란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동심을 일찍 철들게 한다고 했던가요? 초등학교 시절 반장을 지내던 제가 제일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소풍’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반장은 선생님들의 김밥과 각종 간식을 도맡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소풍 가기 싫다”며 철없이 버티다가, 결국은 “김밥을 먹기 싫다”고 우겨 맨밥을 싸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머님의 부끄러운 도시락’을 급우들과 멀리 떨어져 몰래 숨어서 먹다 남겨가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가난한 집안 사정에 철없이 반항한 ‘사건’이었고, 그 일은 모자지간에 큰 상처로 남고 말았습니다.

우리 가족과 함께한 어머님의 일생은 가난의 굴레, 자식과 집안 문제로 한없이 고달프기만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치는 동안 잠시 아버님의 사업이 잘 풀리면서 ‘사모님’ 소리를 듣기도 하셨지만, 집안 사정은 늘 위태로웠습니다. 그런 어머님은 2017년 봄, 암 투병 끝에 73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암세포가 뇌까지 전이돼 기억마저 혼미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참기 힘든 고통 속에 그나마 병상의 유일한 낙은 자식들이 이어폰을 꽂아 들려드렸던 어머님의 애창곡들이었습니다. 그중 ‘여자의 일생’을 들으실 때면 알 듯 모를 듯 눈물을 흘리시곤 했고, 저 또한 병상에서 함께 숨죽여 울었습니다.

어머님은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감당하기 힘든 병마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신 것도 따지고 보면 가족들 때문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것은 어쩌면 ‘여자의 일생’이 아닌, 오롯이 ‘엄마의 일생’이었습니다. 아직도 철없는 맏아들은 그런 엄마가 항상 그립습니다.

아들 강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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