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립습니다 - 아버지 한동수(1923∼1984)

며칠 전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세종시에서 근무하는 아들에게서 난데없이 전화가 왔다. 밑도 끝도 없이 묻는다. “아버지! 현재 돌아가신 분 중에 가장 그립고, 보고 싶은 분이 누구세요?”라고 묻는다. 1도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아버지를 회상해 봤다. 1961년 아버지 나이 38세에 내가 태어났다. 내 위로 형님, 손위 누이 2명, 손아래 누이 1명으로 우리는 5남매다. 한창 보릿고개로 온 국민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즈음 이미 자녀 셋을 슬하에 두고 계셨다.

내 나이로 38세면 1999년이다. 14세 딸, 13세 아들을 키우며 아등바등 살아갈 때였다. 아버지는 필자의 두 자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생하시며 우리 5남매를 키우셨을지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중학교를 졸업한 나의 성적은 목포에 있는 고등학교는 다 갈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아버지는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어쩔 수 없이 입학하게 된 공고, 기름때 묻은 실습복, 얼굴, 시커먼 장갑, 날마다 줄질에 손바닥 물집….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고교 생활에 대한 환상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학교 선택을 잘못했다는 자괴감과 스트레스, 그리고 자격증 시험을 대비하느라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실습.

때마침 자취생활을 도와주시던 고령의 할머니께서 무안 집으로 돌아가시고 혼자 남아 자취생활을 했다. 그리고 1학년 한 학기를 마칠 즈음 쓰러지고 말았다. 설사와 구토, 오한, 그리고 40도를 오르내리는 열, 코피가 쏟아졌다. 장티푸스였다.

한 달이 넘는 입원 치료는 성적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퇴원 이후 혼자 두면 또 병이 날 것을 우려한 아버지께서는 곧바로 손위 누이를 보내 나와 같이 자취하며 살게 하셨다.

내 고등학교 성적은 늘 바닥을 맴돌기 일쑤였다. 3학년 여름방학 무렵,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현장실습을 떠났다.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에 있었던 신한금속으로 기억난다. 나의 고교생활은 그렇게 공고 실습생을 끝으로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후 1995년 적성에 딱 맞는 손해보험 보상팀에서 일하기 시작해 25년이 넘는 세월을 손해사정 일을 하며 현재까지 살고 있다.

이렇듯 쉼 없이 살아온 내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그 무렵 나이가 되고 보니,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과 정이 너무나 그리워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공업고등학교를 권하신 이유는 선택의 폭이 넓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늙으신 어머니와 손위 누이까지 동원해 필자를 뒷바라지했던 그 정성, 그리고 인문계에선 느끼지 못했을 세상의 벽, 그리고 이것을 헤쳐나갈 수 있는 불굴의 의지까지.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물려주셨다.

인생에서 떨쳐버리고 싶어 하던 고등학교 시절, 그토록 존경했던 아버지는 내가 지금의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셨다.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아버지께서는 철없고 힘든 시절 우리 곁을 너무나 일찍 떠나가셨다. 아들의 전화를 끊고 나서 떠올려보니 아버지께서 그렇게 즐겨 드셨던 막걸리 한잔 제대로 사드리지 못한 불효자식의 후회가 막심하다. 너무 보고 싶고 그립다.

한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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