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전승훈 기자
그래픽=전승훈 기자
■ 2.3나노미터 ‘분자 로터’ 움직임 제어까지 성공

기초과학연구원 김기문 연구팀
3중회전 자이로스코프 흡사한
분자 로터에 화학적 자극 가해
회전 · 텀블링 운동 원격 제어

외부 자극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분자 크기 스마트 기계도 가능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계는 무엇일까. 바로 ‘분자 기계(Molecular Machine)’다.

외부자극에 의해 일반적인 기계 장치가 보여줄 수 있는 회전, 직선 운동 등 물리적·역학적 움직임을 극미세한 수준에서 구현, 제어할 수 있는 개별 분자 혹은 분자 집합체를 말한다. 이 세계의 단위는 큰 원자 혹은 작은 분자 하나의 크기인 2∼3나노미터(㎚)를 기준으로 한다. 그래서 나노 머신이라고도 부른다. 나노(nano)는 10억 분의 1이니까, 머리카락 한 올의 두께보다 10만 배 더 얇은 초미세 구조물을 상상하면 된다. 우리 몸속에는 살아 있는 분자 기계들이 있다. 생체 에너지인 ATP를 합성하는 효소는 수소 이온의 이동으로 인한 전압 차이로 회전운동이 조절되는 대표적인 생물학적 분자 모터라 할 수 있다. 이에 대비해 인공적인 화학 합성으로 분자 기계를 만드는 방법도 있다. 인공 분자 기계가 그것이다.

김기문 기초과학연구원(IBS) 복잡계 자기조립연구단장(포스텍 화학과 교수) 연구팀은 선풍기나 발전기, 터빈처럼 로터(rotor·회전자)를 갖는 인공 분자 기계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선박, 비행기, 우주선, 스마트폰 등에서 수평을 유지하고 방향을 탐색하는 3중 회전자인 ‘자이로스코프’와 흡사하게 생겼다. 지구의 자전처럼 회전축이 좌우로 도는 로터리 운동과 막대 회전축이 위아래로 도는 텀블링(tumbling) 운동을 함께하는 로터다.(그림 참조)

이 같은 상하좌우·회전 복합운동은 외부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미묘한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새장처럼 생긴 케이지(외부 틀) 등 프레임 안에 분자 기계를 집어넣어야 한다. 케이지는 빙 둘러가며 로터를 한 겹 싸 외부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원래의 운동량도 그대로 보존하는 게 목적이다. 그런데 케이지 내부의 로터 자체가 워낙 작기 때문에 이를 감싸는 틀을 형성해 기계를 집어넣기가 쉽지 않았다. 국내 연구진은 이번에 케이지를 고유의 기술로 자체 개발하고, 빛으로 내부 로터의 상하좌우 운동을 적절하게 제어하는 데도 성공했다.

분자 기계는 2016년 이를 최초로 설계하고 합성한 연구자들에게 노벨화학상이 돌아갔을 정도로 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돼왔다. 하지만 여전히 ㎚ 수준의 초미세 영역에서 정밀 작동하는 분자 기계를 설계하는 일은 기술적으로 많은 도전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 국내 연구진이 최초로 회전 기계의 구조를 닮은 초소형 분자 로터를 합성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 단장이 이끄는 IBS 연구팀은 자체 개발한 ‘포피린 박스’를 케이지로 사용하는 크기 2.3㎚의 분자 로터를 합성한 데 이어, 이 초소형 로터의 움직임을 외부의 화학적 자극으로 제어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에 앞서 IBS 복잡계 자기조립 연구단은 지난 2015년 6개의 사각형 포피린(P·Porphyrin) 분자와 8개의 삼각형 분자(L)로 이뤄진 정육면체 모양의 다면체 ‘포피린 박스(P6L9)’를 합성한 바 있다. 포피린은 사각형의 거대고리 화합물을 말한다. 이 포피린 박스 내부에는 다른 분자를 삽입할 수 있다. 이어진 이번 후속 연구에서는 그 포피린 박스 내부에 ‘축 분자’와 ‘회전체 분자’를 설치해 로터라는 분자 기계를 만들어냈다. 새롭게 만든 분자 로터는 외부로부터 자극이 오지 않을 때는 아무런 움직임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외부에서 화학적 자극을 가하면 회전체 분자가 축 분자를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는 회전(rotary) 운동과 축 분자 자체가 느리게 돌아가는 텀블링 운동을 한다. 또 화학적 자극뿐 아니라 자외선 빛을 쪼여도 분자 로터의 움직임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다.

연구진은 학내에 있는 경북 포항 가속기연구소의 방사광 가속기를 이용해 분자 로터의 정확한 구조를 분석하고, 핵자기공명법(NMR)을 통해 외부 자극으로 분자 로터의 회전 및 텀블링 운동을 제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방사광 가속기는 빛을 발생하는 입자를 가속하는 장치로, 물질의 미세 구조를 파악하는 현미경 노릇을 한다. 김 단장은 “실험에서 구현된 기계적 움직임을 잘 활용하면 외부 자극에 따라 임의로 조절이 가능한 분자 수준의 스마트 인공 기계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분자 기계 연구는 실험실의 용액 위에서 조절된 것으로 아직 실용적인 활용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앞으로 암세포를 골라 파괴하는 나노 수술 로봇이나 더 작고 더 큰 용량의 메모리 칩 설계 등에 응용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켐(Chem, IF 22.804)’ 1월 19일 자(한국시간) 온라인판에 게재됐다.

노성열 기자 nosr@munhwa.com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