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는 조리나 체와 더불어 물리의 기본에 가장 충실한 살림 도구다. 곡물을 타작하고 난 뒤에 티끌이나 쭉정이를 가려낼 때 쓰는 것이 바로 키다. 널따랗고도 오목한 키 위에 타작물을 올려놓고 위아래로 까부르면 바람이 일어나면서 가벼운 것들은 날아가고 알곡만 남는다. 조리는 비중의 차이로 무거운 돌을 골라내고 체는 부피의 차이로 필요한 크기만 얻어내니 선조들은 물리학은 몰라도 일상에서는 물리의 기본 원리를 알뜰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키는 훈민정음에도 ‘키’로 나오니 고유어이고 예나 지금이나 표기나 소리가 변함이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키의 한자가 ‘箕(키 기)’이고 이의 중국어 발음이 ‘지(ji)’이기 때문에 혹시 중국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고유어와 한자어에 대한 인식이 가장 분명했을 훈민정음에서 키를 고유어로 봤으니 이런 의심은 거둘 수 있다.
바람에 날려 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진성이 부른 ‘안동역에서’의 첫 구절을 들으니 불현듯 키질하는 모습이 생각났다. 위아래로 까부를 때마다 바람에 날려가는 티끌과 쭉정이가 허무한 맹세를 닮아서일까? 기계가 쓸모없는 것들을 미리 가려주는 시절이니 키질을 따로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온갖 매체에서 허무한 맹세를 미리 걸러주니 진실에 대한 키질도 필요 없는 세상이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진실을 가장한 허무한 맹세가 난무하는 세상일수록 스스로 하는 키질은 여전히 필요하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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